연극 '오셀로'의 연출가 심재찬셰익스피어 4대비극 재해석 새로운 데스데모나 기대하세요

차범석, 임영웅, 손진책. 한국연극을 상징하는 이들의 이름은 ‘심재찬’이라는 하나의 교집합을 갖는다. 전자들의 이름이 연극에서 이미 신화화된 면이 있다면, 심재찬은 한국의 신예 연출가들이 지향점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실체’다.

젊은 시절부터 ‘신화들’에서 성실히 자양분을 공급받은 실체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목소리를 뚜렷이 내기 시작했고, 현시대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라는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스물 일곱 살의 심재찬은 1980년에 차범석이 대표로 있는 극단 산하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익히기 시작한다. 1983년엔 손진책의 극단 민예극장에 들어가 연출공부를 이어간 그는 4년 뒤에는 임영웅의 극단 산울림에 몸담으며 ‘거성’들의 노하우를 차근차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중학생 때 처음 이진순 선생님이 연출하신 ‘학마을 사람들’을 보고, 고등학생이 되자 연극연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극계에 입문해서는 이원경, 차범석, 임영웅, 표재순, 손진책 선생님들과 함께 공연을 하면서 현장에서 연출수업을 했습니다. 그분들의 조연출을 하면서 예술 전반에 걸친 행정도 함께 배운 셈이죠.”

1991년에는 직접 극단 ‘전망’을 창단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풍부한 현장 경험과 극단 운영 노하우는 곧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검증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한국연극연출가협회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대 사무처장까지 차례로 역임한 그의 이력은 예술행정가로서의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뿌리를 둔 연극인이 돌아갈 곳은 역시 무대뿐이었다. 한동안 행정가로서 연극계의 큰 형님 역할을 해오던 그는 2007년 현장에 복귀한 이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 해석을 기반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자신의 페르소나들을 통해 풀어냈다.

그런 그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들이다. 지난해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이 ‘셰익스피어 연극시리즈’의 일환으로 선보인 희극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연출을 맡았던 그는 올해 4대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오셀로’를 무대에 올린다. 이번 작품은 고양문화재단과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이 공동으로 기획·제작하는 자체제작 연극.

그는 작년에 이어 다시 셰익스피어 작품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인간의 세밀한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 대사를 통해서 텍스트의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지난해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하면서 셰익스피어가 표현하는 캐릭터들의 진솔함과 당당함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러다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 측에서 ‘오셀로’의 연출제안을 했고, 사랑에 대한 오해와 음모를 치밀하게 보여주는 희곡의 매력에 빠져 수락하게 된 겁니다.”

‘4대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 그래서 연출가로서는 더욱 새롭게 풀어내기 어려운 대상일 수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에 많은 관심을 가져온 심재찬 연출가가 바라본 새로운 오셀로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오셀로의 데스데모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이아고의 악마적 계략으로 무너져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데스데모나는 나약하고 여성적인 온순함으로만 표현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는 무어인인 오셀로와 결혼을 감행하는, 사랑 앞에 용감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동시에 절대적인 정직함으로 이아고의 악마적 계략에 빠진 오셀로를 설득하려는 노력도 보여줄 거에요.”

특히 재해석된 버전의 ‘오셀로’에서 그려지는 이아고의 캐릭터에선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누군가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계략으로 점점 고통에 빠지는 오셀로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 마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이코패스의 악마성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원작 캐릭터의 현신이 될 배우들은 이미 심 연출가와 호흡을 맞췄던 연기자들이기에 더욱 안정감을 준다. 지난해 심재찬 연출의 ‘방문자’에서 함께 공연했던 이남희가 오셀로를, 김수현이 이아고를 맡아 다시 한 번 심재찬 식 ‘오셀로’를 표현하게 된다. 배우들을 편하게 해주는 연출로 잘 알려진 심 연출가는 이번에도 배우들이 여유를 가지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리더는 ‘리드하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연극은 사람들이 하는 작업이고, 가장 아날로그적인 관계들이 오고 가는 작업이거든요. 개개인을 이해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배우를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작업에 임한다면 배우들 스스로도 서로간의 호흡을 조절해 연습과 공연에 나설 수 있는 거죠.”

‘연극’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려는 그만의 연출관은 그대로 작품 세계에도 그대로 드러나 그만의 연극정신을 구현하는 데 일조를 해왔다. 그간 현장뿐만 아니라 학교나 정부의 문화 관계부처에서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제 개인의 욕심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위치가 된 만큼 그도 좋은 후배들을 양성하려는 생각이 없지는 않다.

“그래서 지난해 아르코 인력개발원의 대표교수로 1년간 연극전공 희망자들을 교육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후학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단언할 수 없지만, 가끔씩 제안받는 특강 같은 건 해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연출가로서 현장작업을 지속적으로 해가는 것이 여전히 가장 중요합니다.”

최근 서울연극제 집행위원장까지 맡아 더 바빠진 그는 5월 말 ‘오셀로’의 공연이 끝난 뒤에는 통영연극제에서 희곡공모 당선작 ‘태풍이 온다’를 6월부터 공연할 계획이 잡혀 있다. 이후에도 그에게 쉴 틈은 거의 없을 듯하다. 하반기에는 뮤지컬 한 편과 연극 ‘가을소나타’를 이어서 하고, 체홉의 ‘바냐 아저씨’ 등 내년 1월의 공연 일정까지 잡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린타운’, ‘틱틱붐’ 등 뮤지컬에서도 출중한 연출 내공을 발휘한 그는 개인적으로는 장르를 더 넓혀 새로운 장르에까지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도 내비친다. “모든 예술은 인간사와 세상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다른 장르에서 행해지는 공연예술은 연극과 같은 맥락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미 경기민요 공연이나 뮤지컬 등을 해왔으니까, 조만간 오페라에도 도전해볼 계획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충실히 자신의 기록을 쓰는 심 연출가는 연극이라는 장르에 갇히기보다는 무대라는 세계에 인간을 담기 위해 열심히 무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심재찬 연출가는…


극단 산울림, 민예, 산하, 고향 등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차범석, 임영웅, 손진책 등 연극계의 거목들과 함께 연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1년 극단 <전망>을 창단, 자신만의 연출색을 드러내며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1991)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 '렌'(1994)으로 영희연극상,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1997) 등을 수상, 뮤지컬 '유린타운'(2003)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외국베스트뮤지컬 작품상 수상.

2002년 월드컵 수원경기 오픈 문화행사, 2004 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 개막식 문화행사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문화행사에서도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해왔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