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컬렉터를 찾아서] (4)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교수세계 각지 위스키·꼬냑·와인·맥주 등 1500여 종 10여 년간 수집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술 애호가다.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수술시간. 김 교수는 “생사(生死)가 왔다갔다 하는 수술 실에서 흉부외과 의사가 겪는 중압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수술실 밖으로 나오면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술은 그에게 긴장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달콤한 흐트러짐을 경험케 해주는 묘약이기 때문이다.

술에 대한 지독한 사랑은 그의 탐구욕을 자극시켰다. 바쁜 일정에도 틈틈이 위스키, 와인, 맥주 등 모든 종류의 술에 대해 연구하고, 매년 술을 테마로 여행을 떠났다. 술에 대한 그의 지식은 전문가 수준. 김 교수는 현재 서울대병원 웹진을 비롯해 세 군데의 매체에 술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는 술도 알면 알수록 더 즐길 수 있다는 지론을 편다.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각종 미니어처 술병을 모으는 취미도 갖게 됐다. 마셨던 술에 대한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게 해주는 미니어처 술병

요즘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와인병 수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김 교수와 같은 소망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병의 크기가 크면 공간적인 제한이 금방 올 것이라고 생각해 김 교수는 일찍부터 미니어처를 모았다. 게다가 올망졸망한 미니 술병의 매력이 수집가인 그를 사로잡았다.

미니어처 사이즈에 대한 규정은 없으나, 100ml 이상 크기의 병은 미니어처로 여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50ml짜리 미니어처가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아요. 고만한 크기가 제일 깜찍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는 세계 각지에서 위스키, 꼬냑, 와인, 맥주 등 1500여 종의 미니 술병을 수집했다. 술의 종류뿐 아니라 국적, 제조년도, 병모양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의 소장품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참 많은 종류의 술과 술병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이 뜨인다.

그리고 술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게 만든다. 그가 소유한 미니어처는 금으로 만든 사슴 모양에서부터 책, 축구공, 자동차, 배 모양 등 개성 있고 앙증맞은 모습을 자랑한다.

“병 모양이 독특하고 예쁜 것도 좋지만 제도년도가 명기된 미니어처를 더 좋아해요. 소장가치가 높기 때문이죠. 제가 소장하고 있는 미니어처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16년 산, 그러니까 93년 된 켄터키 버번 위스키예요. 백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마개가 밀봉된 상태로 병 속에 담겼던 술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지요.”

또한 그의 소장품 중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것은 최고급 꼬냑으로 꼽히는 ‘루이13세’ 미니어처다. 국내에 수입된 루이13세는 소매가격이 300만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의 술이다.

우리나라 술 미니어처도 꽤 여러 개를 보유하고 있다. 1981년산 길벗 위스키를 비롯해 VIP 위스키, 블랑디, 베리나인 골드, 블랙잭 등 모두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추억의 술들이다. 김 교수는 세계 수집가들 사이에서 한국 미니어처는 인기가 높다고 알려줬다. 단종된 제품이 많아 희소가치가 높다는 게 그 이유다.

“가끔 세계 각국의 미니어처 수집가들이 모여 각자의 소장품을 사고 파는 자리가 마련 되는데, 한번은 남미에서 온 수집가가 한국산 미니어처를 다수 가지고 나온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온 미니어처를 전부 사들였어요. 꼭 약탈 당한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기분이었죠(웃음).”

좋은 술을 맛보고 원하는 미니어처를 수집하기 위해 그는 미국과 영국, 스코틀랜드, 체코, 멕시코,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김 교수는 “미니어처는 흔하지만, 마니아들이 찾는 물건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미니어처 수집을 위해서는 여행 전에 철저히 사전조사를 하고, 현지 수집가들과 정보교류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귀뜸했다. 영어와 불어, 스페인어, 일어, 중국어 등에 능통한 그의 외국어 실력도 수집활동에 톡톡한 도움을 주고 있다.

미니어처 수집 애주가의 새 지평 열어

병원 밖에서 만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오면 그는 어김 없이 ‘미니 술병(mini bottle) 수집가 000'이라고만 적힌 특이한 명함을 내민다. 그 명함만 봐도 미니어처 수집이 그의 정체성에서 어느 정도의 몫을 차지하고 있는 지 가늠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애주가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애주가 하면 술고래를 떠올리던 시절부터 그는 술을 통해 인생을 더 의미 있고, 풍요롭게 가꿔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수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술병뿐 아니라 술의 가치까지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일상의 억압에서 잠시 해방 시켜 주고, 생활의 추억이 면면이 담긴 인생의 벗이라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 덧붙여 김 교수는 “건강에 좋은 액체”라고 설명한다.

“술 하면 건강에 해롭다, 오래 살려면 끊어야 한다고들 하는데요. 의사로서 그러한 통념에 항변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건강점수표’를 작성해 보면, 담배는 피우는 사람보다 피우지 않는 사람이, 운동은 하지 않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당연히 점수가 더 높게 나옵니다. 그런데 술은 그 반대예요.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적당히 마시는 사람의 건강점수가 훨씬 좋게 나옵니다. 폭음이나 과음이 해로운 것이지 적당히 술을 마시는 건 건강에 매우 이롭습니다. 하버드의대 연구결과도 나오지 않았나요?”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