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34) 미술인 이혁발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전시 잇따라 열며 '화단의 이단아' 부각2006년부터 안동 내려간 뒤 '영혼의 안식'으로 작품세계 진화

미술인 이혁발(47) 씨를 만났다. 명함에도 그렇게 써 있지만 그의 직업은 화가,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사진가, 영화미술감독이다.

장르나 재료에 구애 받지 않고 다방면의 전시를 오랫동안 해온 그는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토털 아티스트, 즉 ‘종합예술인’이라 스스로 명명해 왔다. 연예인 홍서범 씨가 종합예술인 운운하기 훨씬 전에 말이다.

이혁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본명은 뭘까? 혹시, 진짜 변태는 아닐까?’라고. 서둘러 말하자면 ‘이혁발’이 본명이 맞고, 그의 예술세계 안에서 그는 변태가 맞다. ‘자의적인 변태’ 말이다.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예술이죠. 현실을 그대로 말하면 그건 일상 아닌가요? 일상을 뒤집고 시각적으로 사람들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 새로운 일상에 눈 뜨게 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의무라 생각해요.”

고상한 미술동네에 여장을 하고 등장한 남자가 있었다.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 긴 머리에 하이힐, 진한 화장을 한 여자는 농염한 눈빛과 과도한 섹시미를 드러내며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 포르노 잡지나 영화에 나올 법한 누가 봐도 천박한 이미지의 여자는 바로 이혁발 자신이었다.

2 003년 <섹시미미>라는 ‘이혁발의 셀프 누드 퍼포먼스’는 작가 스스로 옷을 벗고 여성으로 변신해 연출하고 행위하고 사진도 직접 찍으며 여장남자의 세계를 보여준 전시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왕 여장남자가 된 김에 그는 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여자와 남자의 ‘합일’이란 의미의 ‘얌자’라는 말을 만들어 공개구혼까지 펼친 것이다. ‘섹시하고 예쁜 얌자를 구합니다’ 뭐 이런 식. 반쪽 트랜스젠더인 얌자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완전한 인간’에 다름 아니었다.

“<섹시미미>전은 일종의 가면놀이 같은 거였죠. 화장품 잡지를 보면 왜 ‘비포어 앤 애프터’가 있잖아요. 여자들이 화장을 하기 전과 후에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제겐 충격이었어요.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변신이라는 주제로 남성 안에 있는 아니마(anima: 여성성)를 드러내자고요. 여자와 남자가 자웅동체처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완벽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성으로 변신하는 일종의 가면놀이 덕에 당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전시마다 성적인 주제를 다루다 보니 사람들은 그를 변태나 곧 커밍아웃을 할 작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가 여장남자로 변신할 모델을 찾지 않은 이유는 가면놀이를 통한 행위예술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변신에 대한 쾌감도 있었지만 팔등신 같은 몸매를 만들기 위해 헬스클럽에서 아름다운 몸 만들기에 그는 열중해야만 했다. 178센티미터 키에 S라인 몸매의 여장남자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파격은 이혁발 씨의 전시 모토 같았다. 시대를 좀 앞서가는 듯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은 고상한 동네에 신선함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1991년 첫 개인전 <싱싱한 다리를 한입 깨물고-진지함의 우스움>전부터 ‘싹’이 보였다고 할까.

그는 당시 작가노트에서 ‘미술은 철저히 시각적이어야 한다. (중략) 육체와 정신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해 성적욕구는 필요하며 그런 욕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어야 한다”라며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자연스러움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저의 작품 속 주제는 인간이에요. 이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 아닐까요? 성에 대한 탐구를 하다 보면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알 수가 있죠. 쾌감을 최대한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지론인데 이왕 하는 예술, 즐길 수 있는 소재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요?(웃음)”

이혁발 씨의 전시를 두고 항간에선 너무 상업적이고 가볍지 않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잠시 의기소침했던 그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으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다 읽고 난 다음 그는 조금 더 단단해지기로 결심했다.

‘섹시미미-하녀 2003’ 이혁발의 셀프사진 퍼포먼스
'섹시미미-하녀 2003' 이혁발의 셀프사진 퍼포먼스

두 번째 개인전 <이미지 채집-가벼운 미술의 즐거움>을 통해 ‘나는 앞으로 가볍고 얕은 미술, 수박 겉핥기 미술을 하겠다’고 치기 어린 선언을 한 것이다. 미술 작품에 인쇄판화란 개념을 처음 도입한 작가인 그는 자신의 ‘인쇄미술’ 작품을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깊이를 강요받아야 하는 미술동네를 향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발이자 예술가로서의 특권이었다. 당시 그는 진지한 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어린 작가’였으니까.

그랬던 그가 안동이란 도시에 터전을 잡았다. ‘양반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에 말이다.

“오래 전부터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무릉도원 같은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영혼의 안식을 위한 예술활동을 하는 게 꿈이었죠.”

2006년 12월1일 30여 년을 넘게 산 정든 서울을 떠나 그는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 자신만의 파라다이스 ‘지상극락 육감도’를 만들었다. 이사한 다음날 아침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핑크색 슬라브 지붕과 600여 평의 앞마당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하얗게 뒤덮인 풍경을 보고 그는 축복의 눈이라 생각했다.

“육감도의 ‘육’은 고기 ‘육’과 숫자 ‘6’을 동시에 가지고 있죠. 인간의 오감에 살덩어리 같은 감각을 하나 더한 의미라고 할까요. 육감도는 육체적 쾌감으로 득도의 경지에 가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공간이기도 하죠.(웃음)”

그는 작년 4월에 입체사진 17점과 회화 4점으로 <안동(安東)에서 안녕(安寧)을 묻다-영혼의 안식(安息)>전이란 타이틀의 9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 중 풍경연작인 <하회마을>, <가매기 마을>, <화천서원>, <산야리> 등은 안동마을 위에 식물과 인체가 섞인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초현실주의 화풍이 꽤 인상적이다.

안동이 이혁발 씨로 인해 무릉도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제가 상상하는 이상향이라고 할까요. 몰랑몰랑하고 부드럽고 감미로운, 그리고 섹시하고 달콤한 이미지들을 많이 담아냈어요. 풍경연작을 보고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요.”

작품세계가 평온과 안식의 이미지로 진화한 느낌이 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안동에 내려오고 나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영혼의 안식과 평안’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5년 <영혼의 장악을 꿈꾸기>, 2000년 <영혼의 땅> 이후 ‘영혼’에 다시 관심을 가졌어요.

아버지 죽음 이후 영혼의 편안함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해 볼 나이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죠. 그때부터 자연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한마디로 뒤늦게 철들었다고 할까요.(웃음)”

철이 든 후 그는 ‘결혼’이란 걸 꿈꾸게 되었다. ‘아이의 탄생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기 때문이다. <안동이란 지상극락 육감도에서 유기농 야채와 철마다 열리는 갖가지 과일나무를 심으며 알콩달콩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사실 분 구합니다>라는 공개구혼을 다시 하라고 하니 그는 쑥스럽게 웃는다.

“명성을 쫓는 바쁜 삶보다는 삶을 사랑하며 사는 현재에 만족해요. 농사를 지으며 과일이 자라면 열매를 따먹고 감각을 즐기며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예술요? 그건 쾌락의 삶에 봉사하고 지상극락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평생 지속해야 하는 일이죠.”

이혁발 씨의 다른 꿈은 없을까?

“에로틱 미술관을 짓고 싶어요. 현대작가 중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연중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끊이지 않는 유쾌한 미술관을 구상하고 있어요. 신혼부부나 국내 관광객은 물론 해외 관광객에게 한국의 에로티시즘을 미술로 보여주는 거죠. 아마 국가적으로도 상당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온갖 꽃과 과일나무가 넘쳐나는 마당에서 꿀처럼 달콤한 과일을 따먹으며 예술을 하고 사는 이혁발 씨는 지상극락 육감도의 ‘아담과 이브’였다. 이미 그의 안에는 아담과 이브가 공존하는 합일과 평화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고 할까.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