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박진우뉴욕 모마 미술관에 명화 패러디한 '리 마스터피스 시리즈' 선보여

누구는 제품 디자이너라고 또 누구는 조명 디자이너라고도 한다. 그 밖의 사람들은 그를 팝 아트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정작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바이올렛과 터키 블루처럼 뜨악할 만큼 강렬한 것들의 조합을 궁리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자기를 뭐라고 부를까에 대해서는 좀 궁금하다고 한다.

지금 뉴욕 모마 미술관에 가면 한 코너에서 ‘Seoul’이라는 팻말을 발견할 수 있다. 벅차 오르는 자부심을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모마가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개최하고 있는 전시회를 본 것이다. ‘데스티네이션 디자인’이라는 타이틀로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이 프로젝트는 여섯 번째 도시로 서울을 찍었다.

그리고 40여명의 디자이너로부터 75점의 작품을 받아 이곳에 전시하고 있다. 모마는 전시회 기간 동안 참가 디자이너 중 4명을 초청했다. 철저하게 아티스틱한 동시에 철저하게 상업적인 모마답게 초청의 기준은 제일 잘 팔릴 것 같은 디자이너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세계인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국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세계인의 눈에는 설기만한 한국적인 것들은 그래서 경쟁력이 있다. 이에 김주 작가의 색동 핸드백과 윤상종 디자이너의 솔잎 문양을 새긴 백자 컵은 충분히 흥미롭다. 세계적 이슈인 재활용도 좋은 주제다. 에코파티 메아리의 송기호 국장이 헌 옷을 재활용해 만든 고릴라 인형은 외국인들로부터 ‘원더풀’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그런데 여기에 지역색도 계몽적 이슈도 없는 작품이 하나 끼어 있다. 대신 웃음이 있다. 폭소는 아니지만 연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에서 여인이 이삭 대신 골프채를 들고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부상 당한 채 전쟁터를 떠나는 근위대 장교(The wounded officer of the imperial guard leaving the battle field)의 손에는 말 고삐 대신 진공 청소기가 들려 있다. 적이 쫓아올까 돌아보는 급박함은 아내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청소를 끝내야 하는 남편의 급박함으로 바뀌었다. 구차한 설명 없이 국적 불문의 웃음으로 모마의 선택을 받은 이 디자이너는 누구일까?

진지한 현실 속에서 웃음을 채취하다

박진우의 ‘리 마스터피스(re masterpiece)’ 시리즈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재미있는 사람인 것은 확신했지만 밝은 사람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작업에는 세계적인 명화뿐만 아니라 루이 비통, 샤넬 등 소위 명품들이 종종 등장했고 역시나 가차 없이 패러디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갤러리에 걸린 로고는 루이 비통을 본 따 만든 ‘러브 비통’이다).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 스파게티 조명 역시 공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전선으로 상류 사회의 상징인 샹들리에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추구하고 동경하는 것들에 대해 가차없는 냉소라도 날리고 싶은 것일까?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시니컬함과는 거리가 멀고요, 제가 의도한 건 웃음이에요. 왜 하필 명화냐고 묻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죠. 저만 아는 작품은 같이 웃을 수가 없잖아요.”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그는 젊고, 심지어 수줍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밝았다.

박진우의 디자인 경력은 그다지 길지 않다. 영국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하고 2003년 귀국해 삼성전자의 가전 제품 디자인을 하다가 박차고 나와 개인 스튜디오를 열어 각종 국내외 전시회에 참여, 최근 자신의 갤러리 겸 숍 ‘갤러리 지누’를 오픈하기까지 채 6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동안 그가 보여준 작품은 하도 다양해 매번 작업을 할 때마다 제품 디자이너, 비주얼 아티스트, 설치 디자이너 등으로 계속 칭호가 바뀌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시종 한 가지다. 장난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현실의 빈틈을 캐치하는 것이다. 엄숙한 장례식 장에서 눈물과 함께 흐르는 콧물이라든지, 처절한 실연의 슬픔 속에서도 정시에 울리는 배꼽 시계 등… 이런 현실의 아이러니함들은 늘 그의 창의성을 자극한다. 그가 비웃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도 부자들도 아닌 딱딱함이다. 항상 점잔을 빼고 지나치게 진지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장난기가 발동한다.

“영국 정치계의 모습들이 저에겐 일종의 쇼크였어요. 보통 정치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선 가장 권위 있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거기는 야당과 여당이 정책 토론을 하는데 서로 야유하고 함성을 보내고, 마치 장난 치는 것 같더라구요. 진지한 상황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리마스터피스 시리즈 가방 / 소재 : 캔버스와 코팅면

그가 장난을 칠 때 사용하는 중요한 방식은 서로 다른 것들의 통합이다. 패션에 그래픽을 시도하고 조명 디자인과 설치 디자인을 하나로 묶는다. 이삭 줍던 노동 계층이 부자들의 스포츠인 골프로 전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컬러 역시 박진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아끼는 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색을 아끼지 않는다. 한 가지 색보다는 배색을 좋아하는데 늘 ‘독한’ 배색을 즐긴다. 강렬한 오렌지와 밝은 하늘색이라든지, 진한 초록색과 불타는 듯한 다홍색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그만의 색 배합은 항상 신선하고 유쾌하다.

그는 요즘 서울대학교와 건국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가르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서 사는 것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많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까지 연결하고 있는 디자이너는 국내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로망이죠. 이런 환경에 있어야 디자인의 질이 더 높아질 수 있기도 해요.”

최근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한국의 아트워크 시장은 수요가 미미하다. 박진우가 노리는 시장도 한국이 아닌 세계다. 그가 대학 재학 시절 과제로 만든 성냥만한 크기의 ‘5분 양초(five minute candles)’는 매년 유럽에 10만개 이상씩 팔리고 있다. 그는 이 양초를 베이스로 한 브랜드 ‘포켓 띵즈’ 론칭을 위해 한창 바쁘게 중국을 오가고 있다.

“제가 주목하고 있는 건 나라가 아닌 도시에요. 디자인 감성이 어느 정도 기반을 이루고 있는 메트로폴리탄을 겨냥해 세계인과 함께 웃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제품들을 보여주려고 해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