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35)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예술감독 박상연'클림트' 전 여운 달래는 이색음악회 '화음(畵音) 프로젝트'로 주목단원들의 개성 이끌어내면서도 고유한 빛깔 가진 오케스트라 지향

전시회에서 그림을 구경하다 필(feel)이 꽂히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평소 좋아하는 거장의 그림을 만났을 땐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찰라 떠오른 영감을 음악이나 시 등 예술 장르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구스타프 클림트’전의 여운을 달래주는 이색 음악회가 열렸다. 전시기간 동안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와 오후 6시에 열린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미술(畵)과 음악(音)이 하나가 되는 ‘화음(畵音)프로젝트’가 바로 그것.

특별한 무대 장치도 없고 화려한 공연장도 아닌 심플한 전시장. 관객과 연주자가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기 딱 좋을 것 같은 장소에 미리 준비된 간이의자만 놓여있다. 성급하게 실망부터 할 필요는 없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플루트, 하프, 오보에 등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미복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좁은 공간에서 울리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은 감동이 두 배이기 때문이다.

방금 구경하고 나온 클림트의 ‘유디트1’이나 ‘비 온 후’작품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순간 전시장에서 느낀 여운은 다시 충만함으로 이어진다. 클림트의 예술세계에 영감을 받은 작곡가 김성기 씨의 비올라 독주곡 ‘모놀로그’와 임지선 씨의 ‘황금빛 비밀-클림트의 고백’ 등 주로 창작곡 위주의 연주를 하는 ‘화음프로젝트’는 공연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의 기립박수를 받은 음악회였다.

“지금 생각해도 화음(和音)이 아니라 화음(畵音)으로 만든 건 잘한 일 같아요. 세계에서도 실력으로 인정 받는 연주자들이 모여 전문 연주장과 구분되는 미술관에서 프로젝트성의 연주회를 80회나 가졌다는 것은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입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음악계에선 들에 핀 야생화 같은 이례적인 개성 있는 그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이하 화음) 대표이자 예술감독인 박상연 씨가 처음 실내악단 ‘화음’을 만든 건 1993년이다. 독일 만하임 음대 졸업과 슈투트가르트 음대 수료 후 독일 라인란트팔츠 국립교향악단에서 비올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8년 간의 독일 생활을 과감히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비교적 여유 있게 살았어요. 한국을 떠나 유학을 처음 왔을 때도 향수병 한번 앓아본 적 없이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하며 살았는데 어느날 정체 모를 외로움 같은 게 밀려오더군요.”

박상연 대표가 독일 생활을 잘 버텨온 이유는 호기심이란 에너지 때문이었다. 대부분 유학생들이 유학 초반에 겪는 향수나 방황의 시간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은 그에게 신대륙이었고 그는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호기심 많은 탐험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호기심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그 순간 독일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자 그는 고민없이 짐을 싸버렸다. 열정이 사라진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KBS 교향악단에서 비올리스트로 2년간 활동했다. 음악을 하고 사는 삶은 무척 행복했지만 그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예술, 사회, 문화, 역사라는 토대 아래 예술적으로 완성도를 높이며 발전 가능한 에너지와 개성을 지닌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내악단 ‘화음’이었다.

화음은 창단 초부터 지금까지 단원을 뽑을 때 인맥이나 이해관계를 철저히 배제해왔다. 대신 아티스트로서 인격과 음악적 완성도를 중요시했다. 화음 단원이 다른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실력으로 인정 받는 단체라는 자부심이 그에게 있었다.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예술상, 음악부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해 공식적으로 최고 연주 그룹이란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부심의 원인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 대표는 화음을 구상할 때부터 실험적인 단체로 만들기를 원했다. 각자의 개성을 양보해가는 평범한 합주형태의 앙상블은 관심 없었다. 대신 개인의 역량을 맘껏 발휘해가면서도 고유의 빛을 뿜어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그는 꿈꿨던 것이다.

(위) 화음프로젝트 - 구스타프 클림트 전 (아래) 화음쳄버오케스트라

화음에는 지휘자가 없기에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연습을 해도 모든 멤버가 토론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제출해 합의과정을 거쳤기에 개성을 살리면서 일치감을 유도해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낳을 수 있었다. 아티스트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온 결과 화음은 올해 큰 잡음 없이 창단 13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위기 한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삼풍백화점의 갤러리에서 ‘화랑음악회’로 출범해 음악, 미술 애호가들을 회원으로 두며 순항하는 듯했지만 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말았다. ‘화음프로젝트’도 동시에 중단되었지만 곧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었다. CJ그룹이 공식 후원사로 나선 것이다. 96년 ‘화음’은 ‘화음쳄버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다시 탄생했다.

“할 줄 아는 게 음악뿐이고 미술은 화가이셨던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릴 적 전시회장을 자주 따라 다녔고 초등학교 때부터 전 늘 그림을 그려왔지요. 미술에 대한 피가 끓는다고 할까요? 음악요? 그건 중학교 때 제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었어요. 음악과 미술의 만남인 화음프로젝트를 만든 건 어쩌면 제 운명 아닐까요?(웃음)”

중학교 2학년 때 난생 처음 들어간 합주반에서 1년 가까이 바이올린을 배운 소년은 바이올린 주자들 속에서 언제나 재능으로 튀는 존재였다. 하지만 음악을 평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사춘기의 열병을 앓고 난 고2 때부터다. 클래식 음악에 사로잡혀 사나흘 식음을 전폐한 후 그는 음악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족들에게 ‘음악 인생을 살겠노라’고 통보에 가까운 선언을 하고 난 다음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연습에 몰두해 서울대학교 음대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졸업반부터 국립교향악단에서 활동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작곡을 전공한 그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비올라를 들고 혼자 힘으로 홀연히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인생 자체가 늘 홀로서기였던 셈이다.

화음은 올해 11월 이후 공식 후원사인 CJ문화재단으로부터 독립한다. 홀로서기에 대한 불안함보다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겠다는 포부가 그에게 있다.

“‘화음프로젝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독자 브랜드예요. 80회나 이어온 화음프로젝트를 재공연하는 것이 우리 목표이자 바람이죠. 그러기 위해선 일정한 장소가 필요해요. 꿈을 실현시킬 만한 미술관이 생긴다면 일반 대중들에게 행복을 줄 기회가 더 많아질 텐데요.”

박상연 대표의 바람은 머나먼 꿈이 아닌 듯 보였다. 화음이 추구하는 음악은 대중과 동떨어진 난해한 장르가 아니라 눈높이를 고려해 창작한 현대음악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난해한 미술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중에게 화음의 음악은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