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의 사랑' 펴낸 이상훈 작가역사속 인물 증언 토대로 야인의 로맨스와 시대상 시리즈 발간 예정

“민족을 위해서만 주먹을 썼던 야인, 조국에 희생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도 제대로 조명돼야 한다.”

지난달 20일 ‘야인의 사랑’을 펴낸 이상훈(58)씨의 말이다. 이 씨는 ‘시라소니(본명 이성순)’의 양아들로 서울 영등포 최대 폭력조직 ‘대호파’의 두목이었다. 그는 13년을 청송감호소 독방 등에서 복역했으나 교도소에서 김대중, 신영복을 비롯한 민주투사들을 만났고 기독교도가 되면서 변모했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한 야인이 또 한 야인의 드라마를 세상에 내놓은 셈이다.

이씨는 교도소에서 만난 김대물(1912~1976)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대물과 서휘의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을 꼼꼼히 기록해뒀다. 김대물은 장쉐량(1898~2001) 국민당 장군의 부대에서 서휘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후에 중국최대 폭력단 ‘삼합회’의 보스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분단 이후에 서휘 살해명령을 받고 북파공작원으로 북에 간 김대물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아와 간첩 혐의를 받고 투옥됐다. 김대물과 함께 장쉐량 부대에서 특수공작 훈련을 받은 서휘는 이후 중국공산당 고위직에까지 올랐으며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여성동맹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지내기도 했다.

증언에 따르면 김대물은 중국과 북한에서 서휘의 목숨을 두 번 살리고 그와의 사랑을 지키려다 옥사했다. 서휘는 상해와 서울에서 김대물을 풀어줬으며, 서휘 살해 명령을 받고 북에 왔던 김대물을 만났다. 서휘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에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현재 생존해있다.

“왜 지금 김대물인가?” 이 씨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는 “많이 배우고 친일한 자들은 자기를 알리고 애국자로 둔갑한 시대”라며 “이 시대에 ‘나는 민족을 괴롭히는 놈들에게 주먹을 썼지만 민족을 향해서는 주먹을 써본 적 없다’고 말하던 한 이름 없는 야인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한 야인의 놀라운 러브스토리

“내 조국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 것이 죄라면 나는 간첩이 맞다.”

김대물이 서휘를 만난 뒤 간첩 혐의로 재판정에 섰을 때 했다는 말이다. 이 씨는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고 1975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 유세 테러 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특별대우를 받았다”며 “독방 감호소에서 모범수 자격으로 정치범들을 산책시키기다 김대물을 처음 만났다”고 소개했다.

김대물에게서 놀라운 인생역정과 사랑이야기를 듣고 감명받은 이 씨는 이를 종이에 기록해뒀다 말아서 성경책에 홈을 파 숨겨뒀다. 이 때 적어놓은 메모가 ‘야인의 사랑’의 초고가 됐다. “‘자네가 민족을 말할 수 있는 위치가 됐을 때 내 이야기를 남겨주게’라는 김대물 선생의 유지를 실현할 때가 된 것 같다”는 게 이 씨의 출간의 변이다.

김대물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야인의 사랑’에 따르면 김대물과 서휘는 중국 국민당 정부 장쉐량 장군 휘하의 반일 무장투쟁단체에서 3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으며 사랑을 싹틔웠다. 장쉐량은 1936년 서안을 방문한 장제스(1887~1975)를 구금해 저우언라이(1898~1976)와 항일전을 위한 국공합작을 합의하게 한 뒤 자진해서 남경정부로 가 투옥된 군인이자 정치가다.

장쉐량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서휘를 비롯한 200여 명의 항일 특수부대는 군용기를 타고 마오쩌둥(1893~1976) 진영에 합류한다. 이 때 김대물은 비행기 이륙을 막는 국민당 군을 사격으로 제압하며 서안 연안에 남게 된다. 김대물의 희생으로 서휘는 무사히 마오 진영에 가담한다.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했던 야인

이 책은 비극적 시대를 살다 갔지만 항상 조국을 품에 담고 살았던 한 야인의 불꽃 같은 사랑을 보여준다. 상하이로 흘러든 김대물은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인 1940년대 상해에서 당시 최대의 정치 폭력조직이었던 ‘삼합회’ 보스로 성장한다. 비록 정치 깡패였지만 상해 최고의 무기거래상으로 성장한 김대물은 암암리에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후원한다.

“김대물 선생을 깡패로 볼 것인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가신 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이 씨에게 한 증언에 따르면 김대물은 원래 평양에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어내는 왜경을 쓰러뜨리고 신의주로 숨어들었다.

신의주에서 다시 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 순사를 박치기로 쓰러뜨려 신의주 독립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김노인(당시 운산금광 사장)의 소개로 장쉐량의 특수부대에 숨어 들어가 반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것이다.

‘삼합회’ 활동 혐의로 국민당 정부에 투옥됐던 김대물은 마오 점령군의 수뇌가 돼서 상해로 온 서휘의 배려로 감옥에서 풀려나 평양에 간다. 김대물은 서휘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몰랐으나 압록강으로 넘어가며 열어본 편지에 쓰인 서휘의 메시지를 보고 눈물을 훔친다.

평양에서 그는 일제시대 순사가 인민군 간부가 된 것을 보고 분을 못 이겨 살해하고 1950년 2월 남한으로 넘어온다. 서울 명동에서 신의주 출신의 정파리(당시 중앙극장장) 등과 깡패생활을 하다 투옥된 김대물은 6.25 발발 이후 조선인민군 정치부국장으로 서울에 온 서휘의 도움을 받아 다시 풀려나 부산 국제시장에 정착한다.

분단 이후 김대물은 북파공작원으로 서휘 살해명령을 받고 월북했다 서휘를 죽이지 않고 돌아와 간첩 혐의를 받았다. 김 대물은 독방에서 양심수로 장기 복역하다 1976년 옥사한다.

저자, 이상훈 역시 불꽃 같은 삶

이 씨의 삶 역시 파란만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평양 출신인 아버지와 함께 신의주에서 서울로 내려온 “시라소니 큰아버지”에게 싸움을 배웠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1981년 6월에는 남부지법에서 재판장과 검사를 칼로 위협하고 탈옥했다 자수하기도 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학생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하나님을 믿게 돼 지금은 장로”라며 “0.8평의 독방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씨는 2001년 교도관 폭행으로 사망한 삼청교육대생 박영두 의문사를 언론에 제보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보호법 폐지를 비롯한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이씨는 2001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해 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출소 이후 김대중 씨 등 야당 정치인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그는 이후 5.6공 피해자협의회 집행위원장 등을 맡으며 민주화운동가로 변신했다. 2004년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 때부터 시작한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으로 남북민간교류 대상(2005), 세계평화상(2007. 미국) 등을 받았다. 자전적 소설인 ‘코리안 마피아(2006)’에서는 조직 폭력배 생활,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 대도 조세형과 서방파 두목 김태촌과의 만남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 씨는 “민초들이 흘린 피와 눈물, 땀에 의해 오늘날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이 됐다면 어떻게 우리가 북한동포의 가난, 질병, 굶주림을 이데올로기 하나로 차단하고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겠는가”라며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숨져간 이름 없는 애국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편견 없이 조명되기를 바라며 분단의 비극을 초래한 일본의 만행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야인의 사랑’이 김대물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지만 학술 논문을 뒤져가며 역사적 고증을 거쳐 사실관계를 확인했으며 독자의 이해를 편하게 하기 위해 소설형식을 취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야인의 사랑’을 시리즈로 발간할 계획이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