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일러스트레이터 이미정] 면세점·백화점·패션 잡지 등과 협업… 상업성 강조한 작품 전시

패션은 예술인가, 상업인가.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을 보고 저걸 입으라고 만든 거냐며 비꼬는 사람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기꺼이 쇼핑을 나서 예쁜 옷을 찾아 헤맨다. 감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일지언정 그 효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벗고 다닐 용기가 없는 한은. 그러므로 패션은 확실히 예술이면서 동시에 상업이다. 그럼 패션을 그린 그림은 예술일까, 상업일까? 슬프게도 한국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나와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패션 일러스트의 효용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존재감 조차 미미하다. 의류학과 학생들이 자신의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 패션 일러스트가 그 이상이 되어 본 적이 있나.

일본의 유명한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는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의뢰로 지난 2003년 그의 그림을 그려 넣은 무라카미 백을 선보였다. 결과는 루이비통 매출의 두 자릿수 신장이라는 엄청난 성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루이비통의 작가 사랑은 그래피티 아티스트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아티스트의 감성은 숨겨진 보석이 되었다. 기업들은 로또를 사는 심정으로 눈에 불을 켜고 ‘대박’을 터뜨려줄 아티스트를 물색한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자신만의 감성을 가지고 생명이 없는 상품에 영혼을 불어 넣어 대중의 지갑까지 감동시킬 수 있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존재할까?

동양에 뿌리 박은 서구의 아름다움

이미정(45)은 얼굴도 없이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늘 듣는 안내 음성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친밀해져 버린 것처럼, 이미정은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그림으로 말해 왔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친 적이 있다면 좋든 싫든 한번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테고 패션 잡지 보그를 펼칠 일이 있었다면 그녀가 그린 컬렉션 일러스트와 마주쳤을 터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이미정의 일러스트가 박힌 옷과 가방이 당신의 눈길을 사로 잡아 잠깐 발 길을 멈춘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서래마을 디 초콜릿 갤러리에서 지북(Z-book)의 후원으로 작품을 전시 중인 이미정 교수가이번 전시의 특징에 대해 묻는 질문에 가장 먼저 꺼낸 단어는 ‘상업’이었다.

“기존에는 패션 일러스트가 옷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취지부터 상업적입니다. 면세점이나 대형 백화점, 패션 잡지 등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패션 일러스트는 순수 미술이 아니다. 상업적 수익은 선택이 아닌 시작이자종착점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순수 미술을 향해 뻗어 있다. 패션 일러스트의 이러한 특징은 재미있게도 그녀가 걸어온 길과 닮았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패션에 대해 단순한 관심을 넘어선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단발령과 교복제가 폐지되고 사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이 자유의 환호성을 지를 때 그녀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내일 입을 옷을 완벽하게 코디네이션해서 걸어두지 않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패션 일지를 썼다.

그날 무엇을 입었는지 기록하고 만족스러웠던 날에 표시를 해두어, 무언가 보여주어야 하는 날 자신만만하게 꺼내 입기 위해서 였다. 그저 취미로만 즐기고 싶었던 패션은 대학을 졸업하고 건너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그녀의 진로에 끼어 들었다.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전공을 살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 생소한 이름을 받아 들였을 때는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해외에서 본 20등신의 그로테스크한 일러스트를 국내에 막 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점점 넓어지는 패션 일러스트 시장

이미정의 일러스트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녀가 항상 한쪽 발을 먹에 담근 채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림 여기저기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동양화의 향기는 이미정의 낙인이나 다름없다. 여백의 미가 그렇고 일필휘지 써 내린 것 같은 간결한 선 (실제로 그녀의 작업 시간은 10분 내외다)도 그렇다.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번짐 효과와 먹을 이용한 농담의 표현은 특유의 우아함과 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기업들이 그녀에게 작업을 의뢰할 때는 하나같이 ‘우아하고 고급스럽게’를 주문하고 또 기대한다.

그녀가 한국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로 척박한 터를 일구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다. 더 이상 사람 머리를 콩알만하게 그리는 그림은 찾아볼 수 없고,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거나 순수 미술의 영역을 넘보는 등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저변이 한층 확대되었다.

일러스트의 힘에 눈뜬 기업들이 작가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활발한 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합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해외에서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아요. 자신의 전속 모델이 있기도 하고, 데이비드 다운튼처럼 유명 인사들의 러브콜을 줄줄이 받기도 하죠.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입지가 미약해요. 한번은 의뢰를 한 기업과 미팅을 갖는데 한 해외 작가의 작품을 죽 늘어놓고 이런 식으로 그려 달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작가의 개성을 먼저 파악하고 연락하기 보다는 기술자로 여기는 태도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수많은 작가들을 하나로 묶어줄 에이전시도 변변치 않은 상황이지만, 전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 선배로서 이미정 작가가 그들에게 제시하는 미래는 다행히도 밝은 색깔이다.

“앞으로 일러스트는 어디에나 쓰일 거에요. 디자인을 강조한 팬시 용품은 물론이고 사소한 생활 용품, 의류, 광고 비주얼, 침구에까지도요.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색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을 기르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수족관이든지, 남극, 사막 등 자연이 보여주는 색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걸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만이 멋진 감성을 표현할 수 있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거든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