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피터 바돌로뮤동소문동 한옥 재개발 막아불확실한 개발이익 현혹 안타까워

“공예ㆍ건축ㆍ역사, 모든 면에서 한옥은 누가 봐도 환상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 불투명한 개발이익 약속만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35년째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옥을 재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는 법원 판결을 받아낸 백안의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1) 씨의 말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 14부(성지용 부장판사)는 4일 피터 바돌로뮤 씨를 비롯한 동소문 6가 주민 20명이 서울시를 상대로 낸 동선 3주택 재개발 정비구역 지정 처분 등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서울시가 15일 이내에 항소하지 않으면 이 지역의 재개발 계획은 전면 취소될 전망이다.

“그동안 지쳐서 머리가 다 빠졌다니까요.” 9일 오후 옛 한국일보 사옥 뒤편 서울 수송동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바돌료뮤 씨의 말이다. 준비기간까지 합쳐 1년 7개월여라는 기나긴 법정소송의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답지 않다. 미국인 특유의 유머감각이다. 회사 부사장, 학회 회장이라는 직함과 환갑을 넘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손수 운전하는 모습, 커피 한 잔과 쿠키로 저녁을 때우는 모습 역시 전형적인 ‘실용’ 미국인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유창한 한국말로 장난 섞인 표정과 농담을 곁들였다. 그러나 소송과정, 한옥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설명할 때는 달랐다. 안경 너머 큰 눈을 부릅뜨고 펜과 종이를 꺼내 적어가며 열변을 토한다.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지킬 줄 아는 열정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한옥은 예술ㆍ자연”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그는 강원 강릉시서 99칸 한옥인 선교장에 살면서 한옥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유리 한 장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한옥과 주인집 식구들의 인간적인 매력에 사로잡혔다. 전공인 경제학이나 직업인 선박 컨설팅과 별 상관없는 건축학ㆍ한국사 책을 뒤져가며 한옥을 공부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봉사단 활동을 마친 지난 1973년부터 서울 동소문 한옥에 둥지를 튼 것은 지금까지의 한옥 생활로 이어졌다.

바돌로뮤 씨에게 한옥이란? 그에게 한옥이란 한마디로 “예술”이고 “문화”다.

‘공예’적 가치. 그가 꼽는 한옥의 첫 번째 매력이다. 그는 마루방의 석까래, 주인이 선택한 한자를 형상화한 문살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바돌로뮤 씨는 “한옥은 누가 봐도 모양이 예쁘고 그래서 좋다”라며 “지붕 밑에 대들보 뿐아니라 기둥 바로 옆의 하방.상방, 문, 안에서 보면 탁 트인 구도까지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한옥 예찬론을 펼쳤다.

‘자연’ 역시 바돌로뮤 씨가 꼽는 한옥의 가치다. 바돌로뮤 씨는 “나무, 돌, 종이, 기와 등 전부 다 자연자재로 만들어지는 게 한옥”이라며 “콘크리트, 유리, 비닐 장판ㆍ벽지를 사용하는 현대 건축과 달리 완전히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재료만 사용하는 독특한 건축”이라고 말했다.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북촌ㆍ옥인동 한옥은 보존하되 리모델링해서 예쁘지만 편리하다”고 답했다.

개량한옥이라 가치 없다고? “한옥은 역사ㆍ삶”

개량한옥의 문화적ㆍ역사적 가치를 폄훼하는 일부 재개발 논리에 대해서도 바돌로뮤 씨는 단호한 태도로 반대한다. 바돌로뮤 씨는 “1920~50년대에 만들어진 한옥이라 할지라도 이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시대별, 지방별로 모양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한옥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2천년 역사를 품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역사적 전통’과 ‘삶의 질감’을 품고 있는 ‘문화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는 문화재로서 한옥의 가치는 신축한옥으로 메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2~3년을 거쳐 건조한 한옥용 나무, 무늬와 결이 드러나되 옹이가 박히지 않은 한옥자재를 지금은 구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생나무는 시간이 지나면 뒤틀리고 홈이 파인다.

그의 사랑은 한옥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25년 전부터 해군 의장대의 추천을 받아 매년 5~6명의 지방 출신 대학생에게 공짜로 기거를 제공하고 있다. 바돌로뮤 씨는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 낫다”며 “사업 때문에 바빠 관리가 필요한 한옥을 청소하고 돌봐줄 사람도 필요하다”며 장난스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당국과 개발이익에 눈이 먼 시민 모두에게 놀랐다고 털어놨다. 바돌로뮤 씨는 지난 2007년 10월께 재개발 구역 지정이 되려면 60% 이상이 돼야 하는 건물 노후도 조사 결과가 60.73%로 돼있는 것을 보고 구청의 조작을 확신한 뒤 소송을 시작했다. 실제로는 리모델링을 해 멀쩡한 건물도 가옥대장상 20년 이상이면 무조건 노후건물로 표기돼 있더라는 것이다.

서울 행정법원 재판부는 “이 지역 정비대상 건축물 중 노후불량 건축물의 비율은 58.75%”라며 “이는 관련 조례에서 정한 기준 비율 60%에 미달하므로 이 지역에 대한 주택재개발 정비구역 지정 처분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인사동의 성공, 숭인동의 실패에서 배워야”

‘개발에 대한 생각’ 역시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게 바돌로뮤 씨의 생각이다. 그는 “개발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매매계약서와 같은 조합설립 계획서에 얼마 받겠다고 명시하고 인감도장 찍었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했다”며 “사실을 사실대로 따지지도 않고, 막연하게 기대해봐야 그 이익은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바돌로뮤 씨는 한옥보존 확인서를 돌리다 재개발을 찬성하는 주민들에게 멱살 잡히기도 하고 협박과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기도 했다.

대형 부지를 만들고 콘크리트 고층 건물을 만들어야 개발이 이뤄진다는 것은 단순하고 좁은 시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바돌로뮤 씨는 “인사동은 주민들이 다 알아서 만들어 성공했다”며 “청계천 8가는 자생적인 상점을 다 쫓아내고 숭인동에 골동품 상점을 만들었만 위치, 교통, 분위기 모두 다 안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이 알아서 좋은 거리를 만들어도 시가 ‘너희가 하는 개발은 필요 없어’라는 식으로만 대응하는 것은 폭력적”이라며 “노후한 청계천 일대 건물은 철거하더라도 골동품 시장과 뒤편의 한옥은 보존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그가 극렬 개발 반대론자인 것은 아니다. 바돌로뮤 씨는 북촌ㆍ옥인동 한옥과 같이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주인의 꿈에 따라 리모델링하고 예쁘게 꾸민 집을 꿈꾼다. 그는 ‘한옥마을’이 아니라 ‘문화마을’이 들어섰으면 한다. 동소문 6가 일대는 주변에 아리랑 고개, 미아리 점집, 4개의 주요대학이 있어 문화마을로서의 입지조건 역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집은 가진 사람 각자의 꿈”이라는 그의 생각이 울림을 준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