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앙팡테리블] (30) 영화감독 여명준도시 무협 '도시락(刀時樂)' 속 도리·도덕·도락… 한우물만 팔래요

“현실 속에 무협지 인물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이 이야기의 출발이었다.”

제목이 ‘칼 쓸 때를 즐기다’로 해석되는 영화 <도시락(刀時樂)>의 장르는 ‘무협’이다. 배경은 현대 서울이나 인물들의 태생은 아무래도 ‘강호’다. 무엇보다 정신이 그렇다. 소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고수에게 도전하는가 하면, 스승은 제자의 복수를 위해 친구에게 칼을 겨눈다.

결투는 경건하고 비장한 의식(儀式)으로 치러지고, “세상 참 얄궂다”거나 “오래 쓰인 칼에서는 그리움이 느껴진다” 같은 무협지 체 대사들이 오간다. 여명준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직접(주연배우이기도 하다) 칼을 쓰는 이치(도리(刀理)), 칼을 쓰는 덕(도덕(刀德)), 칼을 쓰는 즐거움(도락(刀樂))을 설명한다. 운광, 봉국, 천유 등 인물의 이름도 검법의 종류에서 따 왔다.

이런 세계의 기원은 <우뢰매>와 <강시>다. 이 영화들에서 무술 동작이 빚어내는 ‘리듬감’에 매혹된 여명준 감독은 1990년대 초 호금전, 서극 감독 등의 홍콩무협영화를 토양 삼아 ‘무협영화감독’의 꿈을 길러왔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중 만든 첫 단편 <도객류일객>은 일본 에도 시대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소설을 이미지화한 것이며, 졸업작품인 중편 <의리적무투>는 서극 감독의 <칼>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졸업 후에는 아예 스스로 무림에 입문했다. 조선 정조 때 일본과 중국, 한국의 검법을 합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24반 무예’를 익혔다. <도시락>에는 그 “정갈한” 동작은 물론, 당시 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여명준 감독이 직접 맡은 ‘진운광’은 도장 관장에서 떠올린 인물이다.

“관장의 무술 실력은 훌륭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만큼 인정받기는 어렵지 않나. 도장에 다니던 중 잠깐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새 사정이 어려워 문을 닫았더라. 관장이 갈 데가 없어 지인의 사무실에 잠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구석 소파에 자신의 칼과 함께 누운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의 감정이 <도시락>의 정조가 된 것 같다.”

이는 이 영화가 200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줄곧 ‘도시 무협’으로 불리며 ‘도시(都市)락’이라는 두 번째 의미를 갖게 된 까닭이다. 조직 속에서 한낱 부품으로 전락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 치여 ‘경제적’ 능력 외의 면들은 마멸되어 가는 현대적 삶에 대한 페이소스가 짙다.

주인공 유영빈은 결투계에서야 고수지만 회사에서는 무능력한 직원에 불과하다. 나른하고 서정적인 서울 풍경에는 감독 자신이 집에서 영화사로 매일 출근하던 시절의 감정이 녹아들었다.

이런 인물이 이런 풍경 속에서 펼치는 무술이니, 동작 자체가 이야기고 정서다. 내러티브가 화려하지 않고 특수 효과가 없는데도, <도시락>에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크린에 투영되는 움직임 자체에 매료되고 인물과 풍경이 어우러지는 구도, 등장인물의 세세한 표정과 행동을 관객 각자에 비추어 읽어내는 ‘기본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자꾸 일깨우는 영화다.

기본에 충실한 것으로 영화에 무협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이 신인 감독은 “앞으로 나의 차기작이 관객을 당황시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세’나 상업적 요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한국 무협영화를 향한 “일관성”이 곧 여명준 감독의 도리이자 도덕, 도락처럼 보였다.

<도시락>은 지난 6일 서울 명동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