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원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천재적 예술성 진가 볼 수 있는 작품 '베르디 빅5 시리즈' 대미장식

1901년 1월, 여든여덟 살을 일기로 영면한 작곡가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에는 20만 명에 이르는 추도객이 군집했다.

5년간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평생을 오페라 부흥을 위해 살았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당시,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미덕은 그가 인기에만 영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유지만으로도 흔들림 없는 명성을 누릴 수 있던 그는 실험적이면서도 응축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을 내놓았다. <운명의 힘>이 그것이다. "이보다 훌륭한 작품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초연 당시 평단은 흥분했다.

이달 19일부터 22일까지 <운명의 힘>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다.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를 제외한 베르디의 작품을 국내 무대에서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울시오페라단은 19년 만에 <운명의 힘>을 꺼내 들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베르디 빅5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리골레토>, <가면무도회>, <라 트라비아타>, <돈 카를로>에 이어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베르디의 천재적인 예술성, 그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흥행의 요소가 좀 적은, 대중성이 별로 없는 작품이에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같은 작품만 반복하게 되면 그게 바로 문화 편식이 되는 거죠." 서울시오페라단의 박세원(62, 서울대 음대 교수) 단장은 <운명의 힘>을 선정한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좀처럼 국내에서는 볼 수 없던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나 <돈 카를로>를 공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늘 보던 공연만 재탕 되는 반쪽 짜리 베르디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베르디 빅 5 시리즈'는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막을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기대 속 우려도 컸다. 오페라 마니아를 제외하고 지갑을 열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3천 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줄곧 만석이었고 유료관객이 86%에 이르렀다. 오페라의 고장이라는 유럽만 해도 1천여 석의 극장에 70% 정도의 유료 관객이 차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는 고무적인 성과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서울시오페라단은 이탈리아 4대 극장으로 꼽히는 베르디 극장에 작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스텝과 무대, 성악가들까지 한국에서 공연한 그대로를 베르디 극장에서 선보였다. 30여 년간 오페라를 모더니즘 형식으로 현대화했던 그곳은 먼 땅의 동양인들이 그들보다 더 원작에 가깝게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선보이자 기립박수로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는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베르디 극장을 타깃으로 공연 테이프를 보냈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그곳에서의 공연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실제로 선보였더니 '제대로 된 상품'이라며 놀라워하더군요."

서울시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가 베르디 극장에서 공연하고 베르디 극장 측은 세종문화회관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 덕에 상해에서도 공연이 초청되었지만 신종플루로 공연은 무산됐다. 하지만 어쨌든 서울시오페라단은 타 장르보다 더 높은 장벽에 가려져 있던 오페라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 선례를 남기게 됐다.

외적인 성과와 더불어 '베르디 빅5 시리즈'는 내실을 다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장기 프로젝트는 캐스팅 섭외나 연습 시간 확보, 홍보를 위한 여유 있는 시간 확보가 가능케 했다. 관객의 입장을 배려하는 시간도 늘어나면서 공연장의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공연 전, 오페라가 작곡된 현장에서 국내의 오페라 전문가들이 작품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주로 앉는 3층에는 300인치의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현장감을 높였다. 오페라가 낯설던 이들은 작품을 한층 빠르게 이해했고 떠들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공연에 집중했다.

"모험이었어요. 한 작곡가의 시리즈 오페라를 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두 작품 빼고 나머지 세 작품은 해외에서도 잘 안 올려지는 작품이거든요. 베르디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는데, 예상외로 호응이 좋더군요. 요즘 청소년들이 LCD에 익숙한 세대죠. 3층은 무대와의 거리가 멀어서 배우가 손톱만 하게 보이는데, 스크린을 설치하고 난 후엔 학생들이 숨죽이고 공연을 봅니다."

<운명의 힘>을 끝으로 당분간 시리즈 오페라는 쉴 예정이라는 박 단장은 현재 창작오페라를 준비 중이다. 서울시에서 의탁한 작품으로 내년쯤에 완성될 예정이다. "조선시대, 1960년대, 그리고 2000년대까지 세 세대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환생하는 작품이에요. 세 세대를 통해서 한국의 발전상도 한 무대에서 보이게 되죠. 지금까지 우리의 설화나 영웅전에서 한국적인 소재를 얻었다면 이 작품은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가 곧 오페라의 소재가 되는 거죠."

지난해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으로 재임용된 박세원 단장은 여전히 시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베르디 시리즈에서 원작에 충실한 고전적 오페라의 향연이 펼쳐왔다면 앞으로는 현대 오페라의 큰 흐름인 모더니즘의 해석도 가미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관객들이 은연중에 사로잡혀 있는 엄격한 관람 룰에서 풀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일단 경험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여야만 또 다시 오페라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서울시오페라단의 몇 안 되는 직원들과 지속적으로 창의 회의를 열고 좋은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시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