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권옥연 화백한국적 초현실주의 독특한 화풍 완성… '올해의 미술상' 명예공로상 수상극단 자유 대표인 부인 이병복 선생과 함께 세계 첫 부부 예술원 회원

1950년대 이후, 줄곧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해온 권옥연(86) 화백. 초현실주의를 기저로 그가 구축해낸 한국적 초현실주의는 국내외 어느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해냈다.

상형문자, 고분 벽화, 토기나 목기와 같은 소재의 곡선적인 표현과 회색 톤의 절제된 색채는 그의 작품을 문학적 은유와 음악적 선율로 숨쉬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을 본 초현실주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은 '동양적 쉬르레알리즘'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권 화백은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올해의 미술상'에서 명예공로상을 수상했다.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권 화백은 이미 거장이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가 먹을수록 날 괴롭히는 것이 있어요. 몇 년 전 택시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가 나오더라고. 오랜만에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스치는 거지. 그리그, 베토벤, 모차르트 하면 떠오르는 음색이 있고. 피카소와 세잔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모티프나 테마가 있는데, 과연 권옥연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난 모르겠어. 뚜렷한 이미지가 생각이 나질 않아. 내가 뭘 했을까.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하는 것이 모순이겠지만 박수근, 이중섭 화백처럼 두고두고 회자되는 화가들이 부러운거지." 지독한 자기 반성은 명예공로상과 함께 수여됐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끝내 마다하게 만들었다.

"떠나자 보였다."

화가가 될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권 화백은 중학생 시절부터 눈에 띄는 소년이었다. 전국 학생 미술대회에서 특상을 받고 국전에서도 입선했다. 신문에 그의 기사가 실리고, 이미 그때부터 '화가'라고 불렸다.

함흥의 명문가였던 권진사댁의 5대 독자로 태어난 그가 일본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겠다고 하자 조부는 교장까지 찾아가 극구 말리셨다. 돌아가실 때도 갓을 벗지 않았던 조부는 어린 시절 그에게 서예를 가르쳤던 분이다. 권 화백이 구축한 독자적인 양식의 근간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버지로부터는 음악에 대한 재능도 물려 받았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테너 박인수 씨로부터 독창회를 권유받을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갤러리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종종 회자되곤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작품에서 음악적 선율이 느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네요.

작품에 음악적인 면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림에서 곡선이 굉장히 음악적인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직선이 합리적이고 직설적이라 서양적인 것에 가깝다면 곡선이라는 것은 이야기고 설명이지. 조부한테 붓글씨를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붓으로 직선을 그릴 수 없다는 거예요. 서양이 펜의 문화로 대변된다면 동양은 붓의 문화로 대변되는 것이죠. 큰 의미에서 보면 펜과 붓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어.

조부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난 일본 유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내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1941-1945)이 시작되던 시기였지. 당시 일본 출판사들이 책 재고를 넣어둔 창고를 폭격당할까 봐 경매로 엄청난 양을 팔았지. 그때 굉장히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전쟁의 불안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홉까지, 양장본 몇 천 권을 사서 내가 읽고, 또 한국 집으로 부치고 했어요.

결혼 후 파리로 유학을 가신 후로 작품 세계에 큰 변화가 오셨지요. 파리의 예술이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파리로 유학을 가는 일이 굉장히 드물었죠. 남관, 김환기, 김흥수 선생에 이어서 나였으니까.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하려고 할 때 상공에서 내려다 보니 한국과는 너무 다르더군요. 집이며 시내며 모든 게 낯설었어요. 일본과는 또 다르지. 내가 왜 한국의 절, 울타리, 초가집을 좀 더 자세히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리지 않고 비행기를 돌려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고 싶더라고.

전혀 다른 세계, 이질적인 세계와 만나게 되면 푹 몸을 담갔던 문화는 색채가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그때야 비로소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파리까지 가서 갑골문자를 공부하기 위해 한동안 파리 도서관에 파묻혔던 것도 그 이유다.

서양화가시지만 한국적인 색채가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영향이 많겠네요.

내 바탕의 키를 다시 찾게 된 건지도 몰라. 하지만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해서 오방색이나 한글을 가지고 그려야 하는 건 아니지. 중학교 다닐 때 고갱의 장식적인 부분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하지만 파리 유학 때 많이 변했지.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전혀 못 느끼던 문화적 이질감이 굉장했어. 그 이질감이 주는 게 참 많았어.

회색이나 짙은 푸른색의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시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원색을 팔레트에 짜놓으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원색의 옷도 지금껏 입어보지 않았지. 다른 작가들 그림을 볼 때도 내가 바로 말할 수 있는, 퍼너먼트 마젠타, 코발트 블루, 카드뮴 옐로우처럼 물감의 색을 그대로 바른 작품은 그냥 지나가. 기계로 만든 색을 그냥 가져다 바르면 아무 의미가 없지. 자기 톤을 만드는 게, 그림의 시작인 거야.

200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전시를 하실 때만해도 테라코타를 통한 입체작업에 몰두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모르겠어. 나도 내가 지금 뭘 하는지. 끝까지 미스터리일 거 같애. 그 중에서도 인물이 가장.

인물을 그리실 때 모델을 세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모델을 닮게 그리는 게 싫어.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이건 누구 작품이다 해야 하는데, 또 그때부터 화가인 거거든. 모딜리아니 눈에는 누가 모델을 서도 기름하잖아. 누가 모델을 서든 자기 화풍대로 그려지는 거지. 누구와 비슷하다는 건 치명적인 거야. 하지만 대개 어딘가 속하기 마련이지.

"살아보니, 인생은 '만남의 역사'더라."

파리 유학은 그의 70여 년 화업에서 구상화가에서 추상화가로 변화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주었다. 2차 대전의 상흔이 표출된 앵포르멜이 화단을 지배하던 시절, 한국에서 6.25를, 일본에서 태평양 전쟁을 경험한 그에게 앵포르멜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앵포르멜에 완전히 몰입할 수는 없었다. 파리란 도시를 천공에서 바라다보는 순간 전해지던 이질감, 그것이 오히려 그를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것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만난 사람이 스물 살 전후의 가장 존경했던 앙드레 브르통이다. 먼저 만났던 사람은 브르통의 부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권 화백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

"내 옆 방이 학생들의 아뜰리에였어요. 한 할머니가 초현실주의적인 조각을 만들고 있었지. 흥미로워서 한참 들여다 보는데 시선이 느껴지는지 할머니가 돌아보시더군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 그림을 보여드리려고 방에 모시고 왔거든. 한참 보시더니, 남편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하시더군. 마침 아카데미 교장이 지나다가 우리를 소개시켜줬어요. 그 할머니가 앙드레 브르통의 부인이라면서. 깜짝 놀랐지."

놀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담 브르통은 이름도 처음 듣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 자신의 남편을 아는 것을 더 신기해했다. 1924년 발표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권 화백은 이미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급격히 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이 한 줄 추천평을 써주기만 하면 세계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로 등극하던 시절,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던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후앙 미로도 그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어요. 그때 즈음 마담 브르통에게 전화가 왔어. 남편이 돌아왔다고 내일 만나러 오라더군. 가보니 마침 로베르토 마타 에차우렌이란 칠레 작가의 작품을 브르통이 들여다 보고 있었지."

생각보다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마타 작품 옆에 그림을 올리라고 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곧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작품을 평하고는 갤러리 두 곳에서의 전시를 추천했다.

그 중 한 곳은 초현실주의 화가라면 누구나 작품을 걸고 싶어할 정도로 명망있는 곳이었다. 앙드레 브르통이 추천평을 써주고 머지않아 세계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두 아이와 홀어머니가 기다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생이, 살아보니까 별 다른 게 아니야. 어떤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만남을 가지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거 같아. 만남의 역사인 거지." 안타깝게도 그가 귀국하고 오래지 않아 브르통은 세상을 떴고 그것으로 인연도 끝이 났지만 그에겐 가족이 있었다.

유학과 귀국을 거치며 작품 세계를 천천히 구축해가는 동안,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은 그의 아내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배우자는 무대미술가이자 극단 자유 대표인 이병복 선생이다. 6.25 전쟁을 통해 시작된 인연은 지금껏 일생의 동반자로, 동료 예술가로 이어져왔다. 권 화백은 '직접적인 예술적 교류는 많지 않다'고 거리를 두면서도 아내와 예술가로서의 그녀를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그 사람(이병복 선생)이 리더십이 있어. 한 극단을 40년 넘게 이끌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10년 전쯤 체코에서 무대 장치 콩쿠르(올림픽)가 있었는데, 거기서 연거푸 2번 대상을 탔어. 그 사람이 무대 미술을 공부한 적이 없거든. 그런데 2년 이상 상을 타면 심사위원 자격이 생겨서 해외에서 더 유명해졌어. 예술원 회원이 된다는 것도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세계적으로 부부가 예술원 회원이 함께 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야."

권옥연 화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남'과 '인연'은 비단 부부의 연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들의 성장과 양성도 결국은 '좋은 선생'을 만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동시대의 작가들과 교육제도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다.

"우리 시대 작가들이 핸디캡이 있어. 일제시대의 석고데생 교육을 지금까지 잘못해오고 있는 거지. 석고 데생을 하게 되면 눈을 버려. 자유로운 데생이 없어지니까. 입학 시험에 통과한다고 손에 익어버리면 그 이상으로 위험한 게 없어. 모든 것에 그 기준을 대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것도 없지. 하지만 어디까지 석고 데생에 의존해야 하는지 그 기준이 참 어려워. 피카소나 세잔이 석고 데생은 나보다 못했거든. 기본만 갖추면 완벽하게 그릴 필요는 없는 거니까.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게 어렵지. '그만 하면 됐다'고 그 기준을 정해줄 수 있는.."

하지만 그의 눈에 젊은 작가들이 모자라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 한국적인 작가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특히 높게 평가하는 것은 요즘 작가들의 대담성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겁이 없잖아. 그럼 점이 부럽기도 하고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인 요구인 거 같아. 인류의 체질이 변하고 있는 거지."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면 2층 아뜰리에에서 10시간 이상을 머물고 휴식할 때조차 캔버스 앞을 떠나지 않는 권옥연 화백. 손에 붓을 쥘 수 있는 한 그림을 그릴 거라고 말하는 그.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의자(無衣子, 벌거 벗은 아들)'라는 자신의 호에 걸맞게 화가로서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지금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권옥연 화백은…

192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41년 경복고등학교를, 1944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대 이후 줄곧 한국의 주요 작가로 자리해온 그는 1957년부터 60년까지의 파리 유학 생활을 통해 개성적인 추상적 화풍을 구축했다.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살롱 도톤>, <레알리테 누벨> 등 당시 파리의 주요 전시회에 참가했다. 특히 갑골문자 연구를 통해 기호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비정형의 형태와 두터운 마티에르, 청회색의 절제된 색채로 한국적 초현실주의의 독자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1960년대에는 민속공예품과 신라토기에 심취해 토기나 청동기의 토속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며 1963년 파리에서 그룹전을, 1965년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하는 등 국제전에도 여러 번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뉴욕 체이스맨해튼은행,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덴마크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