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즈 디자이너 이보현'슈콤마보니' 파리 트라노이서 좋은 반응… 글로벌 브랜드 꿈꿔

1세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그 위엄, 자부심, 그리고 생고생. 이보현은 한국 슈즈 디자이너 1세대다.

2003년 청담동에 슈콤마보니 매장을 내고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구두 디자인에 불만을 표시하듯 가게에서 아예 검은색 구두를 없애버린 그 때부터 햇수로 7년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만들고 내다 파는 일까지 일당백으로 뛰어야 하는 환경은 그렇다 쳐도, 소비자들은 너무 빨리 싫증 내고 백화점은 해외 브랜드만 예뻐했다.

기껏 머리를 짜내서 만든 장식은 금방 성수동 자재 시장에 카피되어 깔리고 대만 진출을 위해 만난 파트너는 6개월 만에 백화점 문을 닫기도 했다. 해외 진출을 위해 나라 지원을 좀 받으려고 하면 의류 브랜드에만 국한된다며 거절당하는 것도 부지기수.

그 속에서 이보현은 꿋꿋했다. 아니 그것들 때문에 더 단단해지고 노련해졌다. 싸구려 수제화가 판을 쳐도 꼭꼭 구두 안쪽까지 좋은 가죽을 대고 유럽 국가 외에는 자재를 팔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로 개발해서 썼다.

여성스러움과 섹시함이라는 슈콤마보니의 콘셉트를 표현하는 데는 한 시즌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웬만한 자본력으로 밀어붙이는 브랜드들도 몇 번이나 흥하고 망할 시간 동안 이 작은 브랜드는 당당히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웃음이 늘었다. 얼마 전 파리 트라노이 전시회에 참가한 슈콤마보니의 부스 한 가운데에는 쏟아지는 관심에 한껏 상기된 이보현이 있었다.

트라노이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유럽, 홍콩, 중동 쪽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 왔다. 이미 다른 곳에서 수주를 다 해버려 남은 예산이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른 바이어부터, 바이어는 아니지만 지나가다 멈춰 서서 어느 나라 구두냐고 문의했던 사람들까지. 엔도르핀이 팍팍 솟아나는 말을 만 번쯤은 들은 것 같다.

트라노이는 어떤 전시회인가

파리에서 열리는 작은 규모의 전시회다. 규모는 작지만 콘셉트가 확실한 브랜드가 아니면 아예 입장 자체가 불가능한 까다로운 전시회다.

거기서 슈콤마보니가 내세운 콘셉트는 뭔가

일단 제목은 'Woman has a dinner ay thr Bochart in Berlin'이다. 베를린에 갔는데 도통 하이힐 신은 여자를 찾아볼 수 없는 거다. 모든 여자들이 굽 낮은 플랫 슈즈만 신고 다녀서 이상하다 했는데 밤이 되고 어느 럭셔리한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높은 하이힐에 완벽하게 드레스 업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지은 이름이다. 잘 차려 입은 날 신고 싶은 구두, 킬 힐이지만 무섭지 않고 여성스러움을 폴폴 풍기는 그런 신발들을 디자인했다.

현지 슈즈 트렌드는 어떻던가

국내와 비슷하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킬 힐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플랫폼(신발 앞쪽에 붙는 굽)이 유행하면서 킬 힐을 신는 게 한결 편해지자 굽 높이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다. 일단 다리가 길고 날씬해 보이니까 여자들이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부츠 중에서는 발가락만 살짝 노출하는 오픈 토(open- toe)나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싸이 하이(thigh-hign) 부츠가 많다. 싸이 하이 부츠는 소화하기 어려울 거라는 처음 예상을 깨고 아주 인기다.

해외 진출 시도를 일찍부터 시작했다

그렇다. 브랜드 론칭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해외 전시회에 참가했으니까. 그 동안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대만 백화점에 진출했을 때는 주인이 백화점을 오픈한 지 6개월 만에 닫아 버리더라. 우리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초기에 주문이 많이 들어 왔었는데 슈콤마보니가 지향하는 이미지와 너무 다른 중저가 브랜드 매장에 신발이 들어가기도 했다. 현재 유럽과 중국에서는 전부 철수한 상태다. 다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이제는 주문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많이 파는 것보다 중요한 건 뭔가

구두가 어디에 놓이고 누구에게 팔리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슈콤마보니는 깐느 같은 휴양 도시에서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신발이다. 이제는 노하우가 생겨서 우리와 맞지 않는 곳의 주문은 사양할 줄도 알게 됐다. 사실 이번 트라노이에서 가장 좋았던 것도 슈콤마보니의 콘셉트와 어울리는 편집 매장들에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콘셉트가 명확할수록 시장이 좁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해외 시장을 개척하나

그런 셈이다. 국내 시장은 너무 작으니까. 시장 규모뿐 아니라 한국에서 디자이너가 혼자 영업망을 넓히고 인지도를 키워 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마놀로 블라닉이나 지미추처럼 그 이름만으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슈즈 브랜드가 나오기 위해서는 거대기업의 자본력이 필수다. 지미추가 지금의 지미추가 되기까지는 디자이너 한 사람의 영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자본과 영업력을 갖춘 큰 기업들이 캐릭터가 강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인수해서 서로 윈윈하는 사례가 국내에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슈콤마보니도 정말 캐릭터가 강한 브랜드다. 스터드, 세퀸, 호피 무늬가 매 시즌 등장하는 데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성상과 관련이 있나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다. 이런 건 꼭 옷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걸치고 있더라도 거기에 운동화를 신었을 때와 9cm의 가느다란 하이힐을 신고 있을 때의 이미지는 180도로 달라진다.

슈콤마보니 이후로 우리 나라에도 슈즈 디자이너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보현을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요즘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받아 보면 2004~2005년에 해외로 유학을 떠난 사람이 대다수다. 슈콤마보니가 탄생한 2003년을 기점으로 슈즈 디자이너의 꿈을 키운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너무 환상에 젖어 있다는 거다. 킬 힐처럼 화려하고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라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성수동 작업실의 퀴퀴한 가죽 냄새가 슈즈 디자이너의 현실에 더 가깝다.

주변에 무상으로라도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수많은 이력서 중 눈에 들 만한 비결을 가르쳐 달라

우리가 해외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외국어가 되는 지원자라면 좋겠지. 그밖에 학원에서 슈즈 디자이너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성의가 보이면 당연히 한번 더 눈이 간다.

신상녀다 뭐다 해서 국내에도 슈어홀릭들이 늘고 있다. 신발에 미치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해 구두의 중독성을 설명한다면

신발은 많을수록 점점 더 필요해지는 묘한 아이템이다. 두세 켤레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신발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들은 옷과 신발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신발이 줄 수 있는 임팩트를 모르기 때문이다. 스커트를 하나 사면 거기에 어울리는 블라우스와 재킷, 모자가 줄줄이 필요하듯이 신발도 사면 살수록 새 신발에 대한 필요성이 새록새록 생겨난다. 신발에 따라 입은 옷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