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ICSID 차기 회장, 이순인 교수한국인 최초, 36년 만에 동양인 국제산업디자인협의회 회장 탄생'서울 디자인 자산展' 기획하고 '월드 디자인 서베이' 작업 착수

"사람들은 디자인을 겉모습, 포장쯤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와 거리가 멀다. 디자인은 인간이 빚은 창조물의 영혼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던 애플을 구해낸 건, 스티브 잡스의 이처럼 남다른 디자인 철학이었다. 수많은 소비자는 애플사 제품이 가진 기능에 앞서 '소유욕을 자극하는' 디자인에 열광한다. 그리고 이 디자인은 소비자들의 자발적이고도 엄청난 콘텐츠를 끌어들이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21세기가 디자인의 시대라는 사실은 한국 정부나 지자체만 보더라도 체감할 수 있다. 공공 디자인, 디자인 행정, 디자인 도시, 디자인 비엔날레, 디자인 엑스포, 디자인 올림픽 등 '디자인'은 최근 3~4년 사이 관 주도의 비전이나 행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됐다.

산만하고 불편한 도시의 외부적인 개선부터 배려와 소통이 부족한 도시의 내적인 변화까지 디자인이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는 시대다. 게다가 서울은 올해 '세계 디자인 도시'로 선정됐고 선정 기관인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의 회장 마크 브라이텐버그는 새해 보신각 타종식 때 초청되기도 했다.

이런 중에 낭보가 전해졌다.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 차기 회장으로 홍익대 이순인 교수가 당선됐다는 소식이다. 디자인이란 카테고리로 묶인 다국적의 디자이너들이 모인 이 기관의 회장직은, 소위 '디자인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디자인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자리다.

이순인 교수의 차기 회장 당선은 여러 점에서 의미가 깊다. 36년 만의 동양인 회장이자 한국인으로서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개인적인 능력이 크지만 한국 디자인 산업의 역량도 예전보다 성장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편 이 교수를 지지했던 아시아 지역의 디자이너들은 이를 계기로 디자인 산업의 헤게모니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후보 경합 중 제시한 미래 디자인에 대한 비전은 그동안 산업 디자인을 지배하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 것이었기에 각별하다.

착한 디자인에 주목하라

"디자인은 더 이상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만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그동안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해왔거든요. 사람이 쓰기 편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적인 소비를 부추겼지요.

하지만 무분별한 소비는 결국 쓰레기를 증가시켰고 결국 지구를 해치게 된 거죠. 이제 사람을 유혹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지구와 인간을 함께 위하는 '착한'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경고해온,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는 2007년에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8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차기 회장 선거 당시 이 교수가 제시한 이러한 비전은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에 가깝다. 명확한 메시지는 국적을 불문한 학계 인사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반대로 기업 입장에서 보면 환영받을 수 없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착한 디자인으로 성공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닌 거다.

"일본의 무인양품(無印良品)은 이미 20년 전에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시작을 했죠. 생산과정과 소재 자체를 자연친화적으로 했고 또 소비자가 금방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드러냈죠. 과잉되지 않은 디자인은 상품이 아닌 서비스를 판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앞으로 지구 온난화에 위배되는 디자인은 수출도 되지 않을 것이며 과시하고 치장하는 디자인이 아닌 '비우는'디자인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비운다는 의미는 공정과정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곧 고유의 가치를 살린다는 말이다. 이순인 교수가 말하는 착한 디자인은 고유문화의 존중과 정체성 발견으로까지 확장된다. 또한 동시에, '디자인은 유럽 태생이니 유럽의 디자인이 최고이며 정통이다'라는 파시즘적 사고방식을 철저히 경계한다.

"유럽 디자이너들은 아시아에서 돈은 벌어가면서 왜 아시아를 내리 보듯 하느냐고, 선거 당일 제가 좀 세게 얘길 했죠. 친구를 알더라도, 그 사람의 사상과 가치를 알아가기 위해선 시간과 공이 드는 것처럼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고유 가치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거지요.

아프리카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생계를 해결해줄 수는 없어도 그들 나름의 삶의 가치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 그들을 위한 디자인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각 나라가 고유한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발굴하고 개발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합니다." 유럽의 디자인 앞에서 주눅 들 이유가 없는 거다.

생각을 바꾸면, 한국형 디자인이 보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산업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던 LG디자인연구소(당시 금성사)는 이순인 교수의 첫 직장이었다. 1975년 그곳을 시작으로, 35년간 줄곧 디자인 분야에 몸담아온 그는 종종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1989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디자인 엑스포에서, 일본의 디자인 앞에서 하릴없이 초라해져야만 했던 그다. 그러나 일본은 2000년대 들어 한국 디자인에 대한 일본의 패배를 인정했다.

일본의 유력 경제지 니케이는 '한국은 IMF 당시, 디자인에 투자했지만 일본은 축소하면서 디자인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승자의 기쁨도 잠시, 오히려 우리는 일본에 속고 있었다는 것이 이순인 교수의 판단이다.

"지난 10년 동안 그들이 디자인 분야를 포기한 줄 알았죠. 하지만 정부가 산업 지원에서 손을 뗐을 뿐입니다. 대기업보다는 후쿠사와 나오토 같은 디자이너 개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들은 무엇이 착한 디자인인지를 우리보다 앞서서 연구했던 겁니다. 그리고 어린이 디자인에도 이를 포지셔닝 했지요. 아이들의 디자인 관련 교육, 곧 미래에 투자한 거죠.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동차 디자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레드닷과 같은 디자인 공모전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는 요즘이다.

그러나 한국의 디자인은 무섭게 달려오는 중국과 정부의 지원 없이도 자생력을 갖춰가는 일본 사이에 끼인 것만 같다. 우리만의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교수는 한국의 문화가 가진 고유의 디자인적 가치를 깨닫는 것을 그 단초로 보았다. 올해 '세계 디자인 수도, 서울' 행사를 맞아 <서울 디자인 자산 展>(1월 8일~3월 7일, 역사박물관 /10월 8일~31일, 잠실 종합운동장)을 기획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프로젝트는 600년 역사가 숨 쉬는 서울 속 디자인 자산에 대한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를 근간으로 한다. 51개의 자산 중에는 훈민정음, 숭례문, 북촌 한옥마을도 있다.

"디자인이 가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개념이 없으면 남의 것 흉내 내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동안 한국 디자인은 철학 없이 서양 디자인 모방에 급급했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600년 전부터 내려온 헤리티지가 가득하죠. 그 디자인적 가치를 발굴해서 알리기로 한 겁니다. 그래야 디자인 수도를 찾아 서울에 온 외국인들도 한국만이 가진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국형 디자인의 기원을 찾아온 이 교수는 한편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의 차기 회장으로서 거대 프로젝트에도 착수했다.

세계 디자인 자료의 통계를 내고 표준화해 지표를 만드는 '월드 디자인 서베이(World Design Survey)'작업이다. 서울시에서 예산을 보조하는 대신 세계 디자인 데이터를 서울에 두기로 했다. 세계 디자인의 중심이 서울이 되는 셈이다.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에서 몇 년간 집행위원을 하면서 제안했던 아이디어죠. 국가 간 비교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려고 했는데, 마무리를 못했거든요. 세계 디자인 수도를 세계 첫 국가로 유치하면서 서울시에 예산 지원을 해달라고 사업 지원을 했지요. '서울 디자인 리포트'라는 샘플을 만들었고 영역 본을 만들어 전 세계 디자인 단체에 보냈습니다. 이를 기본 틀로 해서 '아세안 디자인 리포트'를 올해 만들 거예요. 지금 자료 모으고 있거든요. 이를 또다시'월드 디자인 서베이'로 확대해야죠."

유럽, 일본 등 소위 선진국에서 디자인 경쟁력은 곧 문화 경쟁력이며 삶의 질의 척도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월드 디자인 서베이'는 디자인 지표뿐 아니라 삶의 질의 지표로도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에서 이순인 교수는 2011년 회장직을 인계받게 된다. 차기 회장으로 워밍업 중인 그의 발걸음엔 벌써 속도가 붙은 듯하다. 디자인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하던 그가 전 세계 디자인사에 어떤 유의미한 씨앗 하나 심어줄지, 기대해본다.

차기 회장제도란… ICSID는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차기 회장 제도를 두고 있다. 앞선 2년 동안은 현직 회장을 보좌하면서 업무를 처리한다. 무엇보다 차기 회장은 일 년에 6차례 열리는 세계디자인연맹(IDA)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순인 교수는…

1950년생.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헬싱키경제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LG전자 유럽디자인연구소 소장, LG전자 디자인종합연구소장 이사를 거쳐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 진흥본부 산업디자인담당 본부장을 역임했다.

2004년부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7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2009년 12월, ICSID의 차기 회장으로 선정되어 2011년부터 2년간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