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김종갑 영문학과 교수작년 9명의 학자, 몸 주제로 학술대회… 연구들 묶어 책으로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최근 출간된 <일상 속의 몸>은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현 시대의 서막으로 인용한다.

소수 권력자의 소유물인 '대문자 역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삶의 무대로서의 일상이 학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대다. 언젠가 아득한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다. 당장의 먹고 자고 싸고 욕망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귀중하게 다루어진다.

이는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의 화두이기도 하다. 몸이야말로 인간이 일상을 구현하고, 일상에 의해 형성되는 가장 가깝고도 상징적인 접합지점이다.

더구나 "의식주와 욕망하는 몸의 처소로서의 일상을,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게 된"(<일상 속의 몸> 머리말) 시대의 변동은 스스로 권력화되어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성찰의 동반자 노릇을 하기 어려워진 학문이 자승자박의 상황을 타개할 기회다.

작년 초 열린 '몸, 일상을 말하다' 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는 이런 시대적 흐름과 고민의 산물이었다. 9명의 학자가 다양한 층위와 방향성으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말해지지 않았던 '몸'을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목격하고 상상하고 체득하는 자기 몸의 이미지(정지은, '현대사회의 이미지 과잉과 주체')에서부터 존재의 일차적 '현상'으로서의 촉각에 내재한 에로티즘(조광제, '에로티즘을 위한 몸 감각의 분석'), 의료 산업에 의해 개인에게 속한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 질병과 노화(최은주, '일상으로서의 질병과 몸'), 나와 타인의 몸을 가르는 인종주의적 시선(염운옥, '인종주의로 바라본 타자의 몸')과 근대화 과정에서 수입되어 여성의 몸을 사회적으로 '조각'한 브래지어(이영아, '패션, 여성의 몸을 바꾸다')까지 범위는 넓지만 각각 구체적이다. 읽다 보면 몸의 경험이 환기된다. <일상 속의 몸>은 이 연구들을 묶은 책이다.

몸문화연구소를 이끄는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김종갑 교수는 "너무 당연해서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낯설게 생각하기가 학문의 역할 중 하나"라고 말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일상은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기에 학문의 중요한 '공간'이다.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인 동시에 시장경제와 문화·미용·헬스 산업에 의해 관리·조작되거나 익명적 타자의 욕망과 시선에 덜미 잡힐 우려가 있는 곳"이다.

<일상 속의 몸>이 지향하는 자기 몸과 일상에 대한 긍정이 쾌락보다는 창조에의 의지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있는 그대로 순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완성해나가야 하는 것이란 뜻이다. 결국, 모두 나름의 일상을 무대로 예술가가 되자는 독려다.

몸문화연구소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그 계기는.

2008년에 시작했다. 계기 중 하나는 스스로 앓고 있는 질병이다. 비염이 심해서 1년에 2~3달은 일을 못할 정도다. 병원에서도 신경성이라는 진단만 내놓을 뿐 치료를 못한다.

아프면 자꾸 몸을 돌아보게 되지 않나. 그 경험이 몸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또 한 계기는 영문학자라는 정체성이다. 한국사회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됐다. 공부한 것을 어떻게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현대의 화두인 몸과 만나 '탈출'하게 됐다.

연구소를 꾸리기 전부터 꾸준히 몸에 대한 연구를 해온 것으로 안다. 여러 접근 방향을 거쳤을 텐데 궤적을 설명해준다면.

사진 찍는 것을 어색해 하는 편이라 카메라 앞에서 특히 몸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 경험이 타자들이 느끼는 사회적 시선을 상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관점으로 역사와 문학, 철학 등에서 몸의 의식을 살펴 쓴 책이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2004)다. 이후 역사를 파고들었다. 시대에 따라 보편적인 몸의 경험이 다르다는 점에 천착했다.

예를 들면 전근대에는 코 풀기, 방구 뀌기, 대소변 등의 생리 작용과 관련한 행동이 공공장소에서도 자유롭게 행해졌다. 하지만 수치감이라는 개념이 생긴 근대에는 이런 행동이 사적인 공간으로 은폐되었다.

여기까지가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2008)의 내용이다. 최근에는 이런 역사적 분석이 좀 작위적이지 않은지 고민하고 있다.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전근대적 몸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우리도 공적 생활에서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면서 친구에겐 친밀감의 표시로 욕하고 툭툭 치지 않나.

<일상 속의 몸>에서는 시인 예이츠의 사례를 통해 남성의 몸에서 현실사회의 질서와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갈등하는지를 보여줬다.('성을 향유하는 노년의 예이츠') 내용을 정리해준다면.

예이츠는 성적 주체로서의 노년의 몸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에는 평생 금욕하다가 노년에 성에 탐닉한 그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

예이츠는 젊은 시절 사랑한 여자와의 결혼도 거부할 만큼 자신의 남성성을 억압했다. 아마도 스스로의 성욕을 위험하게 여긴 것 같다. 그가 살았던 19c 후반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성도덕과 매우 남성적이었던 아버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나이 들어 발기불능이 된 후에야 성적으로 자유로워졌다. 페니스, 즉 상상된 남근과 함께 그 공격성도 없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제야 예이츠는 상대를 정복하고 스스로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없이 유희, 대화로서의 성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례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나.

남성들이 노년의 예이츠처럼 성을 비남근적으로 받아들일 때 남녀관계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웃음) 이는 비단 성관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과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공격적인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도 비남근적 남성성을 요청한다. 이제 힘쓰는 일은 기계 몫이다.

대신 정보를 나누고 정서를 공유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모두 관계의 문제다. 이런 능력은 여성성에 속한다. 돌보고 나누고 공존하는 여성성이 미래다.

주변에서 노년의 예이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나.

능력과 재주가 많은데도 성공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을 버린 사람들이 있다. 대신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따르고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고유한 욕망이라는 게 있나. 그걸 어떻게 구별하나.

우리 대부분은 속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세속적 욕망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세를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한지 의문이 드는 때가 온다. 그런 순간이 그렇게 희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는 푸코가 말하는 존재의 미학, 자기 배려와 관련된 일이다. 영문도 모른 채 줄서고 몰려가는 삶을 관조하며, 멈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유한 욕망은, 아주 어린 시절에 형성된 '나' 같다.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면 그대로 하면 된다.

대중매체의 몸문화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를 들면 최근의 아이돌 그룹 열풍에 대해서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몸 아닌가. 아이돌 그룹의 젊고 호리호리한 몸이 문화 산업화된 것이다. 아이돌 그룹 자신은 그 이미지를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괜찮지만, 수용자가 문제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아이돌 그룹 문화는 기본적으로 수용자의 선택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욕망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른 채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욕망한다.

성형수술하고 다이어트를 해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몸 이미지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매력은 개성에서 비롯되는데, 점점 매력 없는 아름다움만 판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적으로 개성적인 매력이 없어진다는 건 개개인의 매력을 골똘하고 섬세하게 발견해주는 태도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얼굴만 봐도 물리적 얼굴과 표정의 두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못생겼더라도 눈빛이 반짝이면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런데 후자는 무시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을 볼 때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거울을 보더라도 자신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를테면 송혜교와 비교된 나다. 실제보다 더 못생기고 뚱뚱해 보인다. 삼각관계에 빠진 탓이다.(웃음) 이런 시선이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몸이 자꾸 시각으로만 경험되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운동신경으로서의 몸, 예를 들면 공을 찰 때 인식되는 몸 등 주체로서의 몸이 시각적 몸으로 대체된다. 이제 공부하는 몸, 노래하는 몸, 설거지 하는 몸은 없고 보여주는 몸만 있다. 몸이 사회적 맥락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풍부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탈맥락화는 곧 몸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몸문화가 주로 대중매체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이 몸을 가장 극단적으로 상품화하는 방식이 파편화다. 대중매체에서 몸 이미지는 머리카락부터 몸통, 발까지 세분화된 산업에 의해 조각조각 나누어진다. 그리고 각각을 담당하는 산업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도 자신을 그렇게 본다. 몸 전체가 아니라 주름진 눈가, 처진 피부, 탄력 잃은 가슴을 본다. 그리고 이 파편들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미용실, 옷가게, 피부 관리실 등에 분담시킨다. 내 몸으로부터 내가 소외되는 과정이다.

최근 몸 전체를 '통합'하는 패션 스타일링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는 현상이 이해된다.

이런 경향을 부추기지 않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앞서 말한 자기 배려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여유가 생겼단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패션 자체가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된 것 아닌가.

내 몸에 돈을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의 경제적 여유를 문화산업이 조장하는 몸 이미지에 근접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곧 내 욕망이 충실한 것인지는 되물어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광고들이 "나답게"를 외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문화산업이 진화하는 것이다. 이제 개성도 상품화되고 있다. 상품 자체가 다양하게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은 멈추어 생각하는 과정이 없다면 위험해질 수 있다.

쉽게 상품화 이데올로기에 포섭된다. 자기 욕망을 아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내 욕망 이전에 삼성의 욕망 때문일 수 있다.

올해 몸문화학술대회 계획은 어떻게 되나.

2월말에 연다. 주제는 그로테스크한 몸이다. 나와 타자, 선과 악, 미와 추 등 이분법을 벗어난 경계가 바로 그로테스크한 몸이다. 예를 들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몸 같은 것이다.

삶에서는 사실 정상적인 몸의 경계가 늘 무너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현상이 주체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한다. 이를 직시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일상 속의 몸>은 어떤 내용?

'S라인'의 기원은 브래지어다. 근대화 과정에서 브래지어가 도입된 과정은 곧, 여성의 아름다운 몸의 기준이 보급된 과정이기도 했다.

이영아의 '패션, 여성의 몸을 바꾸다'는 1950년대 후반 한 신문이 '체형 교정법'으로서의 브래지어 선택법을 싣는 등,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콤플렉스를 보완하는 '해방'의 도구로써 브래지어가 통용된 맥락을 지적한다.

시장 경제 하에서는 늘 수요가 공급을 낳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나아가 가치관과 상식을 낳을 수도 있다. 현대 여성의 몸에 깃든 한 역사다.

최은주의 '일상으로서의 질병과 몸'은 푸코의 논의처럼 젊고 건강한 몸을 추구하는 사회적 '규범'이 오히려 우리의 몸을 "의학적 식민지의 공간"으로 만드는 현상을 들여다 본다.

즉 몸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가'가 아닌 '어디가 아픈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질병과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었던 역할을 잃고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황동규의 시, 김훈과 까뮈의 소설 등의 문화 텍스트들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초월하는 계기로서의 질병의 고통의 의미를 읽어내고 나아가 과도한 의료 숭배, 운동 집착 등에서 벗어나 언젠가의 죽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미래지향적' 몸을 논의한다.

염운옥의 '인종주의로 바라본 타자의 몸'은 인종이라는, 몸을 매개로 가시화되는 사람의 특성이 주체화 과정에 동원됨으로써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기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즉 백인의 우월하고 선한 정체성은 흑인을 무지하고 악하게 상정한 데서 형성될 수 있었고, 이런 대립적 사고는 성이나 계급 등에 대한 구별 짓기와도 연관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체성이란 얼마나 허약한가.

글은 "사람 간 차이를 손쉽게 선악이나 우열의 가치와 연결짓지 않고, 우선 타자와 만나는 일상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이처럼 몸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을 반영하는 매체다. 이를 인식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자아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상징적 가치가 부여된 대상"(정지은, '현대사회의 이미지 과잉과 주체')으로써 귀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조광제의 '에로티즘을 위한 몸 감각의 분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을 샅샅이 아는 일이 결국 나와 세계의 관계, 우주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깨치는 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알린다. 바로 지금 여기, 내 안에 '우주적 에로티즘'이 있다는 사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