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앙팡테리블] (51) 작가 이예린 등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붙잡는 반전의 시선 보여줘

그때 그녀는 거기 있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뉴욕 시내, 유럽의 어느 광장, 서울의 한 병원 복도나 덕수궁 앞을 지나다가 당신도 그녀를 만났을지 모른다.

홀로 서서 한쪽 팔을 재깍재깍, 초 단위로 돌리던 그녀의 우뚝한 존재감과 한 마디 말이나 공격적 제스처 없이도 사람들을 물러나게 만든 엄숙한 분위기를 기억할지 모른다.

그때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면, 잠깐이나마 멈추어 그녀를 조용히 지켜 보았다면 당신은 비교적 사태를 잘 파악한 셈이다.

대부분의 행인은 안전 거리 밖으로 지나쳐 버렸고, 간혹 그녀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정체가 뭐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전자는 비겁했고, 후자는 무모했다. 그녀의 무표정은 스스로 골똘히 해독해야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때 시계였으니까.

그녀를 둘러싸고 형성된 자장(磁場), 일상을 낯설게 만든 뚜렷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움푹 패임이 바로 '시간'의 정체라는 것을 대부분은 알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은 모든 삶에 근원적 한계고 공포이기 때문이다.

시계에 맞춰 진행되는 일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잊는다. 그럼으로써 생의 유한함, 야욕의 허무함, 순간의 귀함, 감각에 몰두하는 기쁨과 언젠가 사라지기에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함께 잊는다.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놓친다.

"저는 우리를 속박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에 관심이 있어요. 시간을 비롯해서 공기라든지 하늘 같은. 벗어날 수 없다면 아예 밀착해보자 그리고 그 사라짐을 붙잡아보자는 생각이 작업의 원천이에요."

그녀, 이예린 작가가 <시계 되기> 같은 물아일체 작업을 하는 이유다. 작가는 기어코 세계의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붙잡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삶의 한계와 공포를 직시한 산물이기에 그 아름다움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렀다면, 이예린 작가의 작업은 삶의 복잡함과 세계의 경이로움에 비해 너무 쉽게 해독되고, 지루해졌을지 모른다. 그녀는 결정적 반전으로 작업의 차원을 비약(飛躍)시킨다.

퍼포먼스를 편집해 구성한 영상물 <시계 되기3>에는 다양한 시간'들'이 겹치고 꼬아져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으로 진행되는 계절의 축이 있고, 작가의 몸이 만들어내는 초와 분 단위의 시간이 있고, 이 모든 흐름에 대한 역행이 있다.

작가의 팔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거리의 움직임은 거꾸로다. 행인들은 뒤로 걷고, 버스는 노선을 거스른다. 뒤집힌 소리들은 낯익은 듯 기이하다.

예를 들어, 겨울 덕수궁 앞 풍경에서 알 수 없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순서를 잃고 맥락을 놓친 한글 발음들이 서걱거린다. 그걸 보노라면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일상 속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겠구나, 정신이 번쩍 든다.

<시계 되기>는 한 사례일 뿐이다. 작가 이예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인전 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갤러리175에서 열리고 있다.

최근작은 <어느 저녁 탁자lingering dinner table>로 테이블 가운데에 돌아가는 T자형 막대를 설치해, 거기 매달린 숟가락들이 테이블 위 갖가지 식기들을 건드려 소리를 내도록 한 작품이다.

시간의 흐름과 밥을 차리고 먹는 일상, 지금의 도구와 문명을 만들어낸 인간의 욕구와 능력 등 삶의 조건이 저 멜로디와 리듬 안에 다 들어 있다. 작가 이예린의 솜씨는 이제 인간 없이도 인간을 둘러싼 자장을 "구성"하는 데까지 이른 모양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