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파스 화가 한중옥정교한 표현으로 크레파스 고정 관념 깨고 독창적 세계 열어

갤러리를 둘러본 관객들은 이 지극히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작품들을 크레파스로 그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에 다가가 찬찬히 감상하거나 현장에 있는 작가와 큐레이터에게 작품에 대해 이것저것 묻곤 한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더 케이에서 열리고 있는 한중옥 작가의 개인전(3.17~3.23)에서 자주 목격되는 모습이다.

한중옥(53) 작가는 30년 넘게 고집스럽게 크레파스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할 뿐 아니라 세계 미술사에도 매우 드문 경우다.

미디어를 비롯한 첨단 매체들이 현대를 대변하는 표현수단으로 인식되고, 전통적인 평면에서 탈피한 다양한 표현 양식들이 현대미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레파스라니.

'해녀', 2009
크레파스는 크레용과 파스텔이 지닌 장점과 특질 등을 조화시켜 만들어진 근대 이후의 시대적 산물로 미술과는 인연이 길지 않다. 게다가 1920년대 일본에서 개발된 크레파스는 본격적인 회화의 재료라기보다는 회화 수업을 위한 초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고 활용돼 왔다. 여지껏 크레파스는 유년이라는 특정한 시간적 공간과 회화 입문의 도구라는 고정된 가치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한중옥 작가는 그런 크레파스를 현대라는 공간으로 당당히 끌어올려 그것이 지닌 가치를 독창적으로 발현해 내고 있다. 그가 시대와 회화의 본류에서 밀려난 크레파스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얼까?

"미술에서 재료의 한계는 없다고 봅니다. 혼이 담긴 치열한 작업과 창조적 조형의식이 중요하죠. 30년 넘게 작업을 하면서 크레파스가 얼마나 훌륭한 재료이고 독보적인 표현수단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내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한 기반이기도 하고요."

한 작가는 크레파스에 대한 종래의 고정된 인식과 활용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의미 있다고 했다. 그가 크레파스와 인연을 가진 것은 고등학생 때인 1975년 무렵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다. 당시 스승인 고영우 화백은 크레파스로도 작업을 하였는데 한 작가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고 화백은 80년대에 다시 유화로 전환했지만 한 작가는 크레파스 작업을 지속했다. 지난해 5월 두 작가는 제주 이중섭미술관에서 '인식과 시각의 자유'라는 주제의 사제(師弟)전을 열었다. 고 화백은 인간 내면의 고독을 유화로 풀어냈고, 한 작가는 크레파스로 해녀를 중심으로 한 제주의 풍광을 담았다.

'바위', 2010
한 작가의 작품은 크레파스라는 재료의 특수성이 두드러지지만 오히려 작업하는 과정이 더 주목된다. 그의 작업은 마치 노동을 하는 것 같다. 손의 힘을 빌어 색을 혼합하고 이것을 조각하듯 나이프로 깎고 찌르고 새긴다. 대상을 묘사하고 재현하기에 앞서 화면 전반을 보듬고 쓰다듬으며 자신과 일체화시킨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가 얼마나 '제주 화가'인가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제주도의 바위는 화산폭발 시기에 따라 부드러운 것과 거친 것으로 나뉩니다. 소나무(海松)만 해도 육지의 것과 달리 잎이 짧고 껍질에 검은색을 띱니다. 제주인의 삶도 자연과 닮았죠."

제주라는 자연과 그 속에 이뤄지고 있는 삶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뚝뚝 묻어난다. 이는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돼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치밀하며, 독특한 밀도를 지니고 있다. 작품 <바위>, <소나무>, <해녀> 시리즈는 정교하면서도 질감과 명암은 렘브란트가 물감을 쌓아올려 붓 터치를 강하게 드러낸 듯하다. <마애불>의 우툴두툴한 면은 무수한 덧칠을 한 박수근의 투박한 질감을 연상시킨다.

오랜 풍파를 겪었을 바위, 인고의 세월을 헤쳐 온 해녀들, 세속의 번뇌를 씻어 줄 듯한 부처 등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삶의 태도, 미학적 인생관을 엿보게 한다.

"제주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부딪히는 바위를 보면 인생의 '도전과 응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위도 강한 부분은 남아 있고, 약한 부분은 깎여나가는데 삶도 그와 유사하죠."

'마애불', 2007
한 작가는 그렇게 삶을 조각하듯 일련의 소재들을 특유의 섬세하고 조밀한 표현으로 화면에 새겨 넣는다. 이는 자신에 대한 내밀한 성찰에서 출발해 크레파스와 만난다. 어찌 보면 한 작가에게 크레파스라는 재료적 특수성은 작품에서 부차적로 여겨진다.

김상철 미술평론가는 "한중옥 작가의 작업은 분명 치열한 노력의 결과에 따른 기교가 두드러지나 그게 일정 단계를 지나면 기교 이상의 것으로 승화되는 걸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재료의 특이함이나 소재의 특수성에 앞서 작가의 건강한 조형의식과 진지한 사유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중옥 작가는 크레파스 회화라는 일관된 작업으로 제주도미술대전 대상, 특선 등 각종 상을 수상하고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가했다.

그에게 크레파스의 매력을 물으니 "은은한 끌림"이라고 말한다. 유화가 스스로를 내세우며 광택이 나 싫증이 날 수도 있는데 반해 크레파스는 볼수록 빨려 들게 하는 은근함이 있다고 한다. 화면의 색체나 느낌에서 '자연성'에 훨씬 가깝다는 것.

그는 앞으로도 크레파스를 매개로 '실존적 삶 앞에 흐르는 인간 의식의 형상화 작업'에 전력하겠다고 한다. 크레파스의 무한 변신과 또다른 표정이 기대된다.

'소나무', 2009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