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이주영블랙 아이드 피스, 마릴린 맨슨, 레이디 가가 등 유명 뮤지션 러브콜 쇄도

<백화점이 천하를 호령하고 디자이너들의 기운이 갈수록 땅에 떨어지는 가운데 저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바다 건너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저 하니….>

대한민국에 패션실록이 있다면 21세기 초의 상황은 대략 이렇다. 디자이너들에게 야박하기만 한 유통 환경은 도저히 바뀔 생각을 않는 가운데, 오히려 바깥에서부터 불어오는 패션 한류가 디자이너들을 '불끈'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쌩 신인' 취급받는 것을 불사하고 세계 무대를 향해 어려운 길을 뚫고 있는 그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뜨거운 관심과 환영 속에서 첫 발을 뗀 이이가 있다.

정식으로 패션쇼를 열기도 전에 해외 뮤지션들의 콘서트 장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디자이너 이주영. 그저 유명한 뮤지션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고 일축하기에는 필모그래피가 너무 알짜배기라 읊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전 세계 팝 시장을 싹쓸이한 와 레이디 가가, 그리고 악마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한 록 스타 마릴린 맨슨까지. 그들이 입은 옷은 전부 그녀의 손을 거쳤다.

블랙 아이드 피스
"무조건 만들어줘요. 뭘 해도 마음에 들 테니까"

지난 3월26일 서울무역전시장에서는 이주영의 컬렉션이 열렸다. 2004년 '레쥬렉션(resurrectioin)'으로 데뷔 이래 거의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서울컬렉션에 참가한 그녀의 2010 F/W 컬렉션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패션쇼가 끝난 그 다음 주에 만난 그녀는 느긋하게 다음 컬렉션을 구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요일에 컬렉션을 여는 1세대 디자이너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설윤형 씨를 돕기 위해서였다.

"이거 끝나고 나도 쉴 틈이 없어요. 바로 의 월드 투어 의상을 제작해야 하거든요. 5월부터 시작하는 투어 일정에 맞춰서 4월 중순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2주 안에 디자인을 다 끝내야 해요."

지난 2월 그래미 상 시상식에서 의 윌아이앰과 타부는 레쥬렉션의 옷을 입고 수백 대의 카메라 앞에 섰다. 유명 시상식은 패션계와 연예계의 은밀한 거래가 오고 가는 현장이다. 아예 전문 브로커들이 따로 있어 톱 스타에게 특정 브랜드의 옷을 입히려면 최소 1만 달러는 들어가는 것이 상례다.

그렇기 때문에 가 이주영의 옷을 직접 사서 입고 시상식에 나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해 해외 전시에서 이주영의 옷을 처음 접한 그들은 그 후로 여러 차례 그녀의 옷을 구입했고 그 인연이 결국 이번 월드 투어 의상 제작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룹의 음악과 비주얼을 총괄하는 윌아이앰은 그녀에게 작업을 의뢰하며 시시콜콜 주문하지 않았다.

레쥬렉션 2010 FW
"당신이 어떤 디자인을 하든 마음에 들 테니 그냥 무조건 만들어줘요."

뮤지션과들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레쥬렉션의 시작과 만나게 된다. 파슨스 졸업 후 설윤형 부티크에서 일하던 이주영은 국내 록 뮤지션들로부터 스타일링 의뢰를 여러 번 받았는데 그 때마다 골머리를 썩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가 중요시하는 '날씬해 보이면서, 소재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핫한 록 뮤지션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강한 캐릭터의' 옷을 구하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자 옷도 그렇지만 남성복에서는 특히 디테일이 풍부한 옷을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차라리 내가 만들자 싶어서 시작한 게 레쥬렉션이에요."

탄생의 배경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이주영의 옷은 그야말로 디테일의 잔치다. 발바닥부터 종아리까지 빈틈없이 버클로 장식된 부츠도 모자라 바지의 앞과 옆은 끈을 X자로 교차시켜 줄줄이 엮어 놓고, 상의로 올라가면 또 가죽과 퍼가 현란하게 패치워크된다. 이 수많은 디테일들이 하나의 매끈한 착장으로 통일돼 시너지를 발휘하는 힘은 뛰어난 테일러링이다.

데뷔 이래 6년간 욕심을 버리고 디테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바뀌지 않은 것은 인체의 매력을 그대로 살리는 그녀 특유의 핏이다. 어깨에서부터 정확하게 떨어져 허리를 감싸고 탄탄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흐르는 핏은 적당히 근육 붙은 남자의 몸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복잡한 디테일들을 하나로 흡수해 이주영 디자인의 시그니처를 완성한다.

테일러링과 함께 이주영의 또 다른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것은 검은색. 컬렉션의 70% 정도를 올 블랙으로 내놓는 그녀는 무채색을 선호하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걸려 넘어지는 지루함의 함정을 매번 가볍게도 뛰어 넘는다.

케이블 니트, 여러 종류의 퍼, 더 많은 종류의 가죽, 모직과 면 등 온갖 소재로 변주된 블랙의 향연은 검은색 하나로도 얼마나 다양한 아름다움이 가능한지를 증명하는 동시에 그가 검은색이 주는 압도적인 매력에 게으르게 기대는 디자이너가 아님을 보여준다. 보다 먼저 이주영의 옷에 반한 마릴린 맨슨은 뮤직 비디오를 비롯해 중요한 행사마다 그녀의 옷을 입으며 특유의 정교하고 파워풀한 수트에 찬사를 보냈다.

"맨슨이 처음 제 수트 재킷을 보고 이런 안감을 쓴 옷은 처음 본다고 하더라고요. 남자 옷은 안감까지는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평범한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별함을 추구하는 디자인이 많이 어필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레이디 가가의 스타일리스트와도 연락이 닿아 작업을 준비 중이다. 실험과 파격 그 자체를 중시하는 가가와는 콘셉트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세계적인 뮤지션과의 협업은 그녀의 세계 진출에 또 하나의 든든한 커리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르면 내년 초 파리 진출

쇼의 피날레에서 붉은 루즈와 지글지글 볶은 머리로 슬쩍 미소를 띠고 사라지는 그녀는 어쩐지 록 마니아에 집에서도 헤드 뱅잉을 할 것 같지만 사실 두 아이의 평범한 엄마이자 놀랍게도 첼로 전공자다. 중학교 3학년 때 홀로 뚝 떨어지다시피 시작된 미국 유학 생활은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문화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죽도록 힘든 시기, 잔뜩 예민했던 소녀는 첼로를 연주하는 일 외에도 레코드 숍과 오래된 책방, 콘서트 장을 전전하며 무작위로 타국의 낯선 문화들을 흡수했고 이때 보고 느낀 것들은 아직까지 그녀의 디자인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데뷔한 지 6년, 지금까지 4차례 참가한 해외 전시에서 그녀는 세계 진출의 의지를 굳혔다. 국내에서는 안 팔릴 옷, 또는 무대 의상으로만 취급받던 옷들이 바깥에서는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본 것이다. 더 강한 캐릭터, 더 센 디자인을 요구하는 환경은 디자이너의 창의력에 붙을 붙였다. 해외 명품만 대접해주는 국내 시장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것도 결심을 굳히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방향은 파리로 정했고 올해에는 이름을 알리는 데 주력한 뒤 빠르면 내년 초부터 현지에서 컬렉션을 열 계획이다.

"해외에서는 지금 한국 패션에 대해 확실히 호의적이에요. 일본은 한 물 갔고 중국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죠. 물론 한국에도 패션 디자이너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아직 있어요. 그들에게 우리도 세계 무대에 절대 뒤처지지 않을 만한 디자이너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