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필름, 소나무, 바다 중심 작품들 '고요함 속의 기척' 느껴져친구와 작은 요트 구입 해양풍광 집중적으로 담아낼 예정

위용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자연. 감추어지고 정제된 자연이 그 곳에 있다. 파도의 포말이 사라진 바다는 고요한 대지를 닮았다. 고요함이 품어내는 아우라는 보는 이를 사색의 셰계로 인도한다.

그런가 하면 땅 아래 깊숙이 뿌리내린 소나무들 사이로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자연의 은근한 혹은 떠들썩한 속삭임. '소나무 사진작가'로 불리는 배병우의 작품에서 전해지는 고요함 속의 '기척'이다.

수묵화 같으면서 유화 같기도 한, 이질성의 조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수수께끼에 수많은 이들이 매료됐다. 첼리스트 양성원은 그의 소나무 사진을 볼 때면, 베토벤이 숲길을 걸으면서 떠올린 악상이 연상된다고도 했다. 고요함 속에서 감지되는 음률이다.

배병우의 십 년 지기로, 어떤 평론가보다도 그를 잘 아는 치바 시게오(미술평론가, 전 일본 국립미술관 학예실장)는 그 비밀을 이렇게 풀어냈다. "그의 사진 속의 자연이 얼마나 '인간다운가'를 말하고 싶다.

물론 결국 이 '인간의 기척', '인간 내'는 배병우라고 하는 인간 자신의 몸에서 나오고 있다. 그가 셔터를 누를 때, 그 손끝에서 그의 '신체' 그 자체가, 예를 들면 소나무 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로써 이미지는 '보이는' 단계에서 '만지는'단계로 확장된다. 치바 시게오 해석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배병우 작가(61)를 직접 마주한 후였다.

인터뷰를 하던 날, 불과 두세 시간 전, 제주도에서 돌아온 그는 제주도의 난대림 보호구역에서 '베스트 소나무'를 발견했다며 신이 나있었다. "200살 정도 된 소나무인데, 대략 소나무가 그 정도 살죠. 아름드리 소나무가 영양상태도 아주 좋았어요." 나무에도 수명이 있다는 말이다. 30여 년을 소나무 작가로 살아온 그는 이제 숲의 생태를 꿰뚫고 있었다.

"벚나무는 100년 정도 살아요. 팽나무나 느티나무가 500년, 1000년 살죠. 내가 가장 많이 관찰한 것이 나무잖아요. 친숙해지는 거죠. 나무도 사람이랑 똑같아요. 땅이 좋고 정상적으로 살면 그런 것이고, 사람이 비명횡사하는 것처럼, 나무도 폭풍이 불어서 부러지는 애들도 있지요. 아름드리 나무도 넝쿨 서너 개만 감싸도 몇 년 새 죽어요. 숨을 못 쉬니까."

대지를 뚫고 나온 새순을 밟을 수 없어 숲 속 걸음이 조심스러운 요즘이다. 카메라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피어난 꽃들을 얘기하며 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재작년 걸었던 산티아고 길에 천 년 된 밤나무가 있어 좋았다는 그는 마치 식물성 인간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농담 섞인 말 한마디까지도.

하지만 디오니소스교의 교인이라고 할 정도로 술을 즐기고, 사람을 좋아하고, 온갖 재료로 요리를 즐기는 그는 반대로 지극히 동물성 인간에 가까워 보였다. 반대 극에 끌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일까. 그가 유독 나무의 고요함과 바다의 포용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그가 가진 남성성이 반응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 속에서 '고요함 속의 움직임, 기척'이 유독 강하게 전해지는 것은 그의 기질이 관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넓이보다는 깊이

새벽 네 시 반에서 다섯 시 반 사이, 그는 늘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선다. 독학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은 40년을 이어왔다. 카메라와 필름, 트라이포트를 챙겨 들고 태양이 자연에 '생의 호흡'을 불어넣기를 기다린다.

"모든 생물은 태양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죠. 태양이 뜨면서 모든 생명체는 깨어나죠. 그 순간을 찍기 위해 기다립니다." 그에겐 다채로움보다 깊이가 삶의 축이다. 새벽과 늦은 오후의 작업 시간, 필름, 소나무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자연 풍광. 언젠가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포토그래퍼가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변화무쌍함의 미덕은 그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왜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필름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고 자기가 쭉 사용하던 것에선 마이스터가 되기 마련이거든요. 내가 다루기가 디지털보다는 훨씬 쉽죠. 두 번째는 디지털 카메라에선 필름과 같은 깊은 색감이 안 나오기 때문이에요. 디지털은 표류하는 색깔이다. '노매드'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젊은 세대에게 맞는 방식이죠. 그건 공중에 떠 있는, 마치 신기루 같은 겁니다. 가변성을 가지고 끝없이 움직이는 색깔을 가지고 있죠. 필름은 정착된 색이 있어요. 움직이지 않죠.

나무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도 있겠지만 굳이 자연을 프레임에 담아온 이유가 있나요?

아시아의 작은 나라라는 자조적인 생각들을 많이 했었잖아요. 물론 중국이나 미국, 프랑스보다 턱없이 작은 나라고,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의 숲이 굉장히 아름다운 건 사실이죠. 하지만 우리 문제를 우리가 풀어가고 싶었어요. 우리도 주위를 보면 아름다운 숲들이 있고, 그런 숲을 내가 영상으로 선보여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소나무를 찍어오니, 이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뿌듯합니다. 공감치가 주어진 거죠. 누가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지난해 스페인 정부 요청으로 진행했던 알함브라 궁전과 창덕궁 프로젝트가 이색적이었는데…

개인적인 프로젝트 외에 요청받는 일이 많아요. 일전엔 의뢰받아 종묘와 앙코르와트도 했었죠. 알함브라 궁전 촬영과 전시를 제안받고 창덕궁은 제가 제안한 겁니다.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과 궁전이, 우리나라의 창덕궁이라고 했죠. 100장을 찍어서 전달했더니 흡족해하더군요.

전시 카탈로그 서문에 궁전의 소장은 이런 글을 적어 넣었다. "글로써 알함브라 궁전을 세계에 알렸던 워싱턴 어빙에 이어, 백 년 만에 아시아에서 온 진객은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함브라 궁전을 알려주었다."

최근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들만 채택한다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2010년 포스터로 그의 작품이 채택되었다. 숲의 정령이 숲 속을 거니는 듯한 신비스러운 소나무 이미지 위에는 '신과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적혔다. 페스티벌의 올해의 테마인 '신화(mythology)'와 배병우의 소나무는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이제 사진작가 배병우에겐 아름다운 한국의 해변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조량이 많은 여수에서 태어난 그는 조만간 작은 요트를 친구와 공동 구입해 집중적으로 바다를 카메라에 담아낼 예정이다.

"바다에 가면 행복합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가면 '코스트 델 솔(태양의 해변)'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여수와 목포 사이가 '선 벨트(sun belt)'예요.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어가면 바다와 하늘의 시대가 열립니다. 우리나라는 남해안과 서해안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어서 천혜의 해양국가가 될 수 있거든요. 멋지게 찍어서 남해안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알려야지요."

사진작가 배병우는…

1950년 전남 여수 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연구생활(1988)을 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나무, 바다, 산과 같은 한국의 정서를 사진에 담아 온 배병우는 '소나무 작가'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엘튼 존이 그의 소나무 사진을 구입(2005)했고, 해외 유명 브랜드 '시슬리', '망고', '까르띠에' 등의 회장들이 그의 주요 컬렉터들이다. 또 지난해 6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배병우의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선물하기도 했다. 최근엔 201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포스터 이미지로 채택되었다.

배병우의 신작 전시가 열리는 '일우 스페이스'
여수의 바다, 제주의 바다와 오름, 서해안의 굴업도, 기존 소나무 연작의 풀 프레임(full frame) 프린트 등. 배병우 작가의 신작이 전시되고 있는 곳은 최근 개관한 '일우 스페이스(一宇 SPACE)'다. 한진그룹 산하 일우재단이 마련한 전시 공간은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1층 로비에 위치한다. 사진/미술 전시 공간으로, 도심을 오가는 시민들을 위해 무료로 열려 있는 곳이다.

배 작가가 지난해 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에 이어 숨 가쁘게 '일우 스페이스' 전시를 이어간 것은, 일우 스페이스의 문화적 장소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화벨트가 형성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축으로, 시립미술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정동극장, 호암아트홀, 로댕갤러리, 한국국제교류재단(구 호암미술관 자리)으로 이어지는 문화지대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개관기념전으로는 배병우 작가의 작품 15점이 오는 6월 6일(일)까지 전시된다. 이어서 지난해 선정된 '일우사진상'의 수상작가인 백승우, 김인숙 작가의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또 전시관람이나 미술 관련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계획 중이다. 관람 시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이며, 토요일은 오후 1시부터 6시 30분까지다. 일요일 및 공휴일은 휴관. T. 02-753-6502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