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의 김용택 시인농담처럼 찾아와 따뜻하게 살아 있는 고단한 삶의 마지막 보루

김용택 시인의 등장은 영화 <시>의 유일한 농담이다. 그는 주인공 미자(윤정희)가 찾아가는 동네 문화원의 시 강좌 강사 '김용탁' 시인 역할을 맡았다.

첫 강좌 시간, 김용택 시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자 관객들은 도리 없이 웃는다. '김용탁'이란 이름의 기시감에 긴가민가했던 마음들이 예의 그 둥근 인상에 푸근해진 덕이다. 게다가 그는 친절한 선생님이다. 시를 가르치려고 손수 사과를 준비해 왔다.

"여러분은 살면서 몇 번이나 사과를 봤습니까? 수천 번? 수만 번이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번도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사과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무슨 말을 하나 귀기울여보고 주변에 깃드는 빛도 헤아려보고 그러다 한입 깨물어보기도 했어야 진짜 본 것입니다."

사과를 대하는 저 다정한 방법들을 통해 '보다'의 뜻은 풍성하고 따뜻해진다. 그러니까 저 말이, 저런 눈과 태도가, 바로 저 사람이 '시'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미자는 배운 대로 노력한다. 집 앞 나무, 길가의 꽃, 도도한 강에 하염 없이 머물러 본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가 써지지 않아서 다음 강좌 시간만 기다린다. 선생님에게 발을 동동 구르는 말투로 "시상은 언제 찾아오냐"고 묻는다. 시인의 대답은 허허실실이다. "시상은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찾아가 사정해도 올동말동 한데요."

그 장면에서 김용택 시인의 얼굴도 알듯말듯하다.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당황한 것 같기도, 어린 아이를 어르는 것 같기도, 자신의 고민을 들켜 뜨끔한 것 같기도, 더 좋은 대답을 줄 수 없어 곤란한 것 같기도 하다. 혹은 그냥 '신인' 배우의 어색한 표정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미자의 일상을 평안과 기쁨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을수록,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게 고통스러운 순간에 문득문득 그 얼굴이 생각났다.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가엾이 여기는 표정이었다. 어리석고 가난한 채로 운명에 시달리는, 그러면서도 쓸쓸하고 허름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악착같이 일으켜 세우는 미자와 우리, 그리고 사는 일에 대해서.

이창동 감독이 하고많은 시인 중에서 김용택 시인을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표정은 짓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것이다. '김용탁' 시인을 통해 농담처럼 다가온 시는 고단한 삶의 마지막 보루, 우리가 인간임을 일깨우는 마지노선, 때로는 하염 없이 기대어 있고 싶은 추억 등의 풍성하고 따뜻한 뜻으로 영화 내내 살아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우리는 영화 초반 김용택 시인을 만난 장면이 가장 마음 놓이는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일 전주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났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시는 것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스크린에서 뵈니 새롭더라고요. 어떻게 출연하게 되셨습니까.

영화 <시> 이창동 감독과 대화하는 김용택 시인
-재작년에 이창동 감독이 내 강의를 녹화해 갔어요. 이유를 묻지 않고 잊어 버렸는데, 작년에 시나리오를 전해주더라고요. 그때 녹화한 걸 장면으로 만들었대요. 그런데 시인 이름이 김용탁인 거에요. 아주 웃음이 났죠. 그러고는 다시 연락해서 "평생 영화 봐 왔으니 이제는 은막에 데뷔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서워서 거절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길래 못 이긴 척 출연하게 됐죠.(웃음)

그럼 강의 내용은 그대로인가요.

-사물을 자세히 보는 자세를 가지라는 내용은 그대로죠. 시라는 게 사회가 말하는 것, 자연이 말하는 것을 받아쓰고 베끼는 것이니까요.

첫 연기였는데 어떠셨나요.

-처음엔 겁 없이 하니 금방 오케이가 났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굳어가더라고요. 이창동 감독은 오래도록 잘 알아서 가족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원래 가족 앞에선 강의를 안 하잖아요. 그리고 강의다 보니 대사가 길고 상대 배우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어떤 장면 하나는 너무 책을 읽어서 창피해요. 편집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니까요.(웃음)

신인인데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어요.(웃음) 크래딧에도 다섯 번째로 이름이 올라가 있던데요.

-저도 인터넷으로 확인해 봤어요. 포스터를 돋보기로 들여다 봤더니 이름이 있더라고요.(웃음)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보셨어요.

-영화에 절제미가 있어요. 많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관객보다 먼저 우는데, 우리는 안 울죠. 참고, 말 하지 않고, 견뎌요. 억누르는 게 더 많이 전달한다는 걸 아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이창동 감독의 인품이기도 해요. 그 자신이 많이 참는 사람이에요. 품이 크죠. 영화를 만든 것보다 그런 사람을 알게 된 것, 배우게 된 것이 더 좋아요.

그런 영화여서 보는 게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그렇죠. 관객을 힘들게 하죠. 차마 말도 안 나오는 삶이 있다는 걸 드러내서 우리 내면의 고통을 건드리니까요. 여운이 오래 남고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에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까요.

강의를 많이 다니시니까 극중 미자 같은 분도 많이 만나셨겠어요.

-시골에서 시 좀 배운다고 우쭐해 하는 면이 있는 인물이죠. 희화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리얼해요. 농경 사회에서 도시 변두리로 와서 사는 삶은 팍팍하고, 또 그만큼 과장되어 있어요. 늘 저기 화려한 도시 중심부를 동경하면서 팍팍함을 감추려고 하니까요. 그런 변두리를 찾아가는 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이기도 해요.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게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시를 안 읽을까요?

-이창동 감독이 처음에 시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물어서 "시집도 안 팔리는데 '시'라는 영화를 볼까?"라고 되물었어요. 시는 영상과 달리 감동이 더디게 오죠. 요즘은 워낙 빨리 변화하니까 느긋하거나 기다리는 것을 거부하는 세태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자동차가 세계를 바꿔 놓은 것 같아요. 그 속도가 보는 습관과 생각을 바꿔 놓은 거죠.

그에 비해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제법 많은 것 같은데요.

-놀랍게도요. 시인들도 시집을 안 읽는단 뜻이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요즘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시는데, 혹시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으세요.

-하루 동안 연이어 강남과 경기도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강남 아이들 450명 정도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데 참 잘 듣더라고요. 그 나이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러워요. 그런데 눈들이 반짝반짝해서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러고는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갔는데 전교생이 한 300명 정도 돼요. 선생님들이 전경처럼 아이들을 둘러쌌더라고요. 이 아이들은 하도 말을 안 들어서 10분 만에 강의를 그만 두었어요. 서로 힘드니까 그만 두자, 하고요. 그날 돌아오면서 왜 이렇게 다를까, 생각했어요. 양극화되어 버린 거죠. 부잣집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교육, 문화적 경험, 여행 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도록 마음이 골라진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 받은 아이들은 그렇게 돌보아지지 않은 거죠. 이들 간의 골을 메우는 게 국가의 숙제예요. 가난한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들이 같은 사회 속에서 같은 나이대로 살아야 하니까요. 소외된 아이들을 치료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해요.

제의가 온다면 또 영화에 출연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글쎄요.(웃음) 사실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긴 해요. 러닝셔츠에 파자마 바지 입고 파리채 들고 고등학생 놈이 담배 사러 오면 휘휘 때려 쫓는 구멍 가게 주인이요. 아니면 읍내 조폭, 몇 장면 나오고 죽는 그런 역할 꼭 해보고 싶어요.(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