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대석]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 산파 역할… 국격 높이고 청소년에게 인성교육'책'과 '사람' 두 기둥으로 이룬 문화계 대부 새로운 봉사 청사진

지난 4월 21일과 2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오픈아트페어(SOAF)'와 '서울포토 2010' 개막전 행사에 그는 어김없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보다 보름 전쯤인 8일, 한진그룹이 서울 중구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에 시민을 위한 문화전시공간 '일우스페이스' 를 열었을 때, 그리고 29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꼭두박물관 개관 기념행사가 열렸을 때도 그는 명사로서 참석해 덕담을 건넸다.

이처럼 국내의 크고 작은 문화계 행사에 그의 발걸음은 늘 부지런하다. 일흔을 넘긴 나이와 사회적 명성에 비추어 쉬엄쉬엄 갈 만도 한데 그는 요즘 더 바쁘게 문화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는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제2대 이사장에 선출된 후 올 4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국민과 기업 등의 헌금, 기부를 바탕으로 문화유산을 매입해 보존하는 활동을 펴는 특수법인이다. 1895년 영국에서 문화·자연유산의 보존을 위해 시민들이 시작한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을 모델로 삼아 2007년 4월 출범했다.

전남 보성군 벌교 '보성여관'
지난 주 서울 경복궁 내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에서 만난 김종규 이사장은 특별한 '인연'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이 내가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에 있을 때 건물이에요. 2004년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세계박물관대회(ICOMP)를 성공적으로 치렀던 자리인데 묘한 인연입니다."

김 이사장은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게 된 게 '운명'처럼 여겨진다면서 불교에서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켜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끄는 '화주(化主)'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유산은 미래세대의 정신적 자산입니다. 내 역할은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화주라고 볼 수 있지요."

김 이사장은 더 많은 국민이 '문화재 지킴이'로 나서도록 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요즘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을 늘리는 일이라고 한다.

"정부 힘만으론 전국 구석구석의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해요. 국민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이 '문화재지킴이' 역할을 할 겁니다."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행사
그러면서 나름의 '인생론'을 말한다. "사람이 90세까지 산다고 할 때 첫 30년은 준비하고 배우는 기간입니다. 두 번째 30년은 생업에 매진하는 기간이고 나머지 30년은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실제 김 이사장은 인생의 첫 30년은 책을 모으고 출판인의 기초를 다진 뒤 두 번째 30년은 삼성출판사에서 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자신의 생업에 전력했다. 마지막 30년에 들어서는 만 60세인 1999년 한국박물관협회 3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박물관맨으로 사회에 봉사해왔다. 그에게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새로운 봉사의 여생인 셈이다.

김 이사장이 문화 관련 신생 기구의 책임을 맡은 데는 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위원회 위원장으로 법인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삶의 궤적과 문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철학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평이다.

김 이사장은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삼성출판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장 등 직함만 20개 가까이 되는 '문화계 대부', '문화계 마당발'로 통한다.

문화계 각 분야의 광범위한 인맥군은 김 이사장의 든든한 자산으로 이는 '책'과 '사람'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뤄졌다. 김 이사장은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났고 사람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현재의 인맥군을 형성했다.

김 이사장이 '전천후 문화인'인 된 출발점은 책, 출판이다. 1960년대 삼성출판사 부산지사장을 맡은 이래 역작들을 잇달아 내며 출판의 일가를 이뤘다. 한국단편소설선집,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선집 등은 누구나 한두 권 볼 정도로 인기였다.

무엇보다 김동리, 황순원, 박경리 등 당대 작가들의 책을 내면서 인연을 맺었고 박경리 작가는 <토지>를 낼 때 인지를 찍는 도장을 아예 출판사에 맡길 정도로 신뢰가 돈독했다. 김 이사장은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문화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았다.

출판인의 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서적을 수집한 김 이장은 30년간 모은 책을 토대로 1990년 출판인쇄박물관을 열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쇄문화를 가졌는데 변변한 출판박물관이 없었다는 게 박물관을 세운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 김 이사장을 바라본 시인 고은은 최근 완간한 <만인보(萬人譜)>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70년대 지식인들은 삼성출판사 세계사상전집을 읽어야 했다. 그 출판사를 이끌어가며 그는 박물관을 세우고 민(民)학회를 만들어 민화를 모아들였다."

'궁중 우물 보전 및 공공활용을 위한 협약식' (3월 18일), 왼쪽부터 웅진코웨이 홍준기 사장, 문화재청 이건무 청장,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삼성출판박물관은 2004년 서울 구기터널 어귀의 독립건물로 이전했다. 6층 공간에는 국보 제265호인 <대방광불화엄경> 권13, 보물 제745호인 <월인석보>권22 등 문화재를 비롯해 근‧현대 도서류, 출판 인쇄 도구, 고문서, 문방구 등 출판 관련 자료 40만여 점이 빼곡하다.

김 이사장은 출판인에서 박물관맨으로 변신해 역량을 발휘하면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박물관협회 3~4대 회장을 맡았다. 김 이사장은 재임 중 협회가 정부사업의 공식파트너로 인정받고 전국 박물관을 조직화하는 등 내실을 기하고 국내외에 협회의 위상을 높이면서 중흥기를 이끌었다. 특히 2004년 서울에서 아시아국가로는 처음으로 세계박물관대회를 개최한 것과 '한국 박물관의 글로벌 시대'를 연 것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ICOM 서울세계대회 공동조직위원장으로 활약한 김 이사장은 "세계박물관대회를 계기로 한국 박물관에 세계 오리지널 작품 전시가 가능해졌다"면서 "그것은 경제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로 한국의 문화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고 말한다.

출판인, 박물관맨으로 50년간 한국 문화의 중심에서 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국민의 문화적 안목을 높여온 김 이사장은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아 또다른 '문화 지킴이', '문화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첫 사업으로 전남 보성군 벌교초등학교 앞에 있는 보성여관을 매입해 복원 및 문화공간화 작업을 추진중이다. 경북 울릉군의 근대건축물 이영관 가옥의 보수 복원공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엔 국민은행의 기부금으로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시인 이상의 집터를 매입해 올 하반기부터 문화공간화 사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최근에는 경북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선생의 사택을 보존하는 데 기념사업회, 경주박물관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윤경렬 선생은 우리나라 문화재지킴이 운동의 1세대이며, 특히 불교문화운동을 펼친 인물로 불교계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요즘 어디를 가든 '문화재지킴이 10만 양병'을 주장한다. 한 달에 1만 원씩 회비를 내는 회원을 현재 700여 명에서 1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올해 1000명 회원을 목표로 했는데 8월이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10만 양병'을 낙관했다.

김 이사장은 "영국은 내셔널트러스트 회원이 350만 명인데 우리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며 "회원이 많을수록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착도 높아지고 문화재를 함부로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청소년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청소년들이 21세기 문화지킴이의 주역이 돼 전통문화를 알게 되면 선조들에 대한 공경심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애국심으로 이어지는 인성교육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 이사장은 국가 지원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마중물을 붓듯 사업 초기에 국가가 기틀을 잡아주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지난 3월 18일 유엔이 정한 '세계 물의 날(3월 22일)을 앞두고 문화재청, 웅진코웨이와 함께 경복궁 강녕전 옆 어정(御井)에서 '궁중 우물 보전 및 공공활용을 위한 협약식'을 가졌다. 이를 통해 '궁중 우물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궁궐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우리의 품격 있는 궁중 생활문화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 식목일에 즈음한 4월4일에는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들이 '시민과 함께 하는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행사에 참여해 폭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수목과 경관을 보전하였다.

김 이사장은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은 국격을 높이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면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국민들이 주체가 되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홈페이지 www.nationaltrustkorea.org
Tel : 02)732-7521, 7524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전남 무안 출생(1939년), 동국대 경제학과 졸업(1964년), 삼성출판사 부사장(1965년), 삼성출판사 대표이사(1987년), 삼성출판사 회장(1992년), 삼성출판박물관장(1990년 ~ 현재) 정부 광복5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위원 역임(1995년), 한국메세나협회 이사(1996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장(2004년~),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2009~)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