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배수아신간 <올빼미 없음> 소설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의 연장선꿈과 환상요소 도입 8편의 단편 통해 서사 해체과정 보여줘

프롤로그- 배수아 풍으로

너는 책 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제목은 <올빼미의 없음>이고, 표지는 올빼미 그림이 그려진 것인데, 그것은 작가의 이전 장편 <북쪽거실>보다 훨씬 직접적인, 그러니까 장편 <북쪽거실>의 서술보다 사건과 사유의 배치가 더 날 것으로 드러난 소설집의 모양새를 닮은 책- 책장을 펼쳐 단편 8편의 제목을 읽고는 첫 작품 <양의 첫눈>의 양이 양(羊)인지 양(洋)인지, 사람의 이름인지를 생각하며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많은 공상을 해가며-이를테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무슨 음악을 틀어야 몰입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이 작가의 작품은 난해한데 그렇다면 책의 뒤에 있는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작품을 읽으면 더 잘 읽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 방식대로 작품을 마냥 읽어보고 싶기도 해서 그대로 읽기로 마음먹으며- 양의 이야기, 정확하게 양에게 벌어진 몇 가지 일들과 그 일을 마주치며 양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문장들을 한줄 또 한줄 읽어갔고, 내용을 되새겼고, 이 작가가 왜 이렇게 사건과 사유와 이미지를 쪼개고 쪼개 쓸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러나 이 사건과 사유와 이미지의 파편은 또한 얼마나 정교하게 작품에 배치되었는가를 감탄하며, 이 작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언어에 의지해 드러내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언어 자체와 언어가 놓인 자리라 추측했고, 표제작과 같은 단어가 들어간 두 번째 단편 <올빼미>는 표제작 <올빼미의 없음>과 연작 형태는 아닌가, 기대하며 그 단편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

이 한 줄의 문장을 줄이면 '너는 책을 읽었다'가 된다. 인물, 사건, 배경이 소설 구성의 3요소라는 근대문학의 정의 기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작품에 이 모든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이 세 요소는 이야기, 서사를 빚어내는 재료이고 이 재료가 덜 들어간(?) 채 쓰여진 소설이란 그러므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그것이 근대 이후, 문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가장 큰 비결, 즉 '독자 몰입'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하지만 서사를 벗어난 이야기, 언어와 언어가 부딪치는 파열음은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소설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라는 어느 소설가에게나 붙여도 좋을 말은 작가 배수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사가 되었다.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말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문법에 신경을 안 써요. 나는 한국어의 문법에 따라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지 않고, 필요하다면 주어와 서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도 쓸 수 있어요. 그런 변이성이 텍스트 안에서 얼마나 온당하게 보이느냐, 그건 작가의 몫이겠죠."

한 번도 그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는 독자를 위해 평론가 김형중의 말을 빌어 좀 더 차별화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력을 다해 읽거나, 혹은 가급적 이른 시기에 읽기를 포기해야 할 책'. (장편 <북쪽거실> 해설)

이것이 배수아의 방식이다. 2003년 펴낸 책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그녀는 분명히 밝혀두었다.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녀의 글은 뱀과 화염의 강물을 '이야기'하고 있고,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온전한 의미의 소설이 아닌 소설과 에세이 사이의 글이다. 작가를 설명하는 말은 다시 '소설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란 그 닳고 닳은 수사로 종결된다. 신간 <올빼미의 없음>은 그 연장선이다.

"(사건 중간에 뛰어드는) 화자의 사고가 제 의식을 직접 반영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것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스토리텔러는 아니거든요. 그걸 원하지도 않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글을 쓰겠지만,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선명하고 일관된 서사를 해체하는 기법으로 꿈과 환상의 요소를 도입한다. 신간 <올빼미의 없음>에 실린 8편의 단편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프롤로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첫 단편 <양의 첫눈>은 양이란 인물의 하루 일과와 양의 의식이 주된 내용이다. 오래전 여자친구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은 양은 그녀가 방문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한 남녀의 모습을 엿보며 과거 그가 만났던 이들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올빼미>와 <올빼미의 없음>, <무종>은 꿈과 환상의 요소가 사건과 화자의 사변이 어떻게 결합하고 배치되는가를 보여준다.

<올빼미>는 주인공 '나'가 비평가인 '너'와 꿈과 글쓰기에 관해 나누는 대화와 서신, '나'가 연애감정을 느꼈던 첫 번째 작가와 두 번째 작가의 기억, 첫 번째 작가와의 교우 등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소설로 이 가운데 꿈을 통해 펼쳐지는 상징과 암시가 서사와 사변의 단편을 관통한다.

<올빼미의 없음>은 너(독일문학평론가인 외르그)의 죽음을 맞닥뜨린 나의 죽음에 대한 사색과 애도가 주를 이룬다. 실제 작가가 독일체류에서 알게 된 문학평론가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한 번도 읽지 못했지만, 그녀의 '최초의 문학적 스승'이 됐고, 그녀는 평론가의 죽음 이후 이 소설들을 썼다.

작가는 "카오스의 한가운데서만 나오는 그런 작품은 영원히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작가와 화자의) 거리두기, 객관화가 와해되어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 지난 해 <올빼미의 없음>, <무종> 발표 후 한 인터뷰에서 "지금 내 관심사는 '없음은 어디에 있는가'이다"라고 말했다. 이 화두를 품고 있기 때문에 평론가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온 건가, 아니면 평론가의 죽음 이후 이런 화두를 고민하게 건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죽음은 너무나 유혹적인 테마다. 왜냐면 죽음은 신의 다른 이름기도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요소가 있다. 누구나 다루는 소재이지만, 누구나 생각하는 보편성의 범주를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죽음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평론가의 죽음을 겪고 죽음이 육체적으로 다가오는 충격을 받았다."

- <올빼미의 없음> 이후 바로 쓴 <무종>에서도 꿈과 현실이 한 몸처럼 붙어 있다. 서사를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꿈이나 몽상을 많이 쓰는 이유가 있나?

"하룻밤에 꾼 꿈을 한 편의 소설처럼 쓰는 것이 작가로서 희망 중의 하나다. 독일어 책을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 때는 책 내용도 훌륭하지만, 그 사람의 언어가 내가 쓰는 한국어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다. 그 세계(꿈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다. 또한 나는 내가 겪지 않은 것, 타인의 경험을 최대한 객관화 시키고 리얼한 성격을 부여해서 묘사하는 것보다는 꿈을 쓰는 게 더 풍요롭다고 느낀다. 읽는 사람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드라마틱한 체험보다 나를 매료시킨다. 몇 년 전부터 집중하고 있다."

- 그렇게 해서 쓴 작품을 구체적으로 예로 들자면?

"가장 의식해서 쓴 작품은 장편 <북쪽거실>이다."

단편집 맨 마지막에 실린 <밤이 염세적이다>는 작년 가을 출간된 장편 <북쪽거실>의 밑그림과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 수니의 꿈과 화상, 진술 자체가 서사를 압도하며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오직 이해받지 못함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종류의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288페이지)는 표현처럼 긴 호흡의 복문, 낯선 감각의 독특한 표현은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매혹적이다.

작품집이 묶인 지난 4년의 시간을 그녀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151페이지, <올빼미의 없음> 중에서)
책을 덮고 나면, 독자에게 몇 줄의 잠언만이 남으리라. 그녀의 꿈과 몽상으로 걸어가는 마법의 주문만이.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