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소설가종전 직후 1950년대 양양서 태어난 6살 여자 아이의 성장기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는 대개 그의 신작이 나올 때다. 그에 관한 몇 줄의 기사를 쓸 때, 그 몇 줄보다 더 짧은 한 마디로 끝을 맺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냥 읽어보세요'라고. 길고 긴 이야기가 기사 몇 줄에 요약될 것이라면 작가가 왜 한 권의 책을 썼겠는가.

작가는 그래서 <작가의 말>에서 동어반복을 할 뿐이다. 뒤집어보면 이 몇 줄에 그 이야기에 대한 모든 메타포가 담겨있다. 소설의 숲에 관한 자기방식대로의 지도인 셈. 이경자 작가의 신작 <순이>의 작가의 말은 어떠한가. 제목은 다음과 같다.

'슬픔의 발원지를 헤매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슬픔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이왕에 시작했으니 그 몇 줄을 옮겨본다. '슬픔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두렵다. 그래서 모든 고향으로 난 길섶엔 조목조목 그리움이 손짓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이다. 1948년생의 작가는 이곳에서 열여덟 살 때까지 살았다. <순이>는 종전 직후인 1950년대 양양에서 태어난 6살 순이의 이야기다. 이 작품과 작가의 유년시절이 겹쳐 읽히는 이유다. 그 고향으로 가는 길이 왜 슬프고, 어둡고, 두려운가.

양양은 수복지구, 분단 직후 북한 지역이었다가 전쟁을 겪고 다시 남한으로 편입된 땅이다. 하루아침에 생과 사의 갈림길이 나뉘는 대치상황에서 아이가 자란다. 이데올로기와 상관 없이 부모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아이는 자연과 함께 자라지만, 전쟁의 참상은 트라우마로 가슴 깊이 박힌다. 이때의 상처란 참혹한 시간을 통과한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경험일 터, 작가는 "한 개인으로서의 순이가 아니라 우리 역사가 낳은 순이를 따뜻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민족적, 사회적 고통을 분별력 없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아이가 어떻게 그 고통과 폭력에서 탈출하고 성장하는지 쓰려고 했어요. 한 아이가 어떻게 전쟁의 상흔, 후유증, 기독교와 같은 새로운 문명과 만나고 이를 내재화하는가.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죠."

소설은 전쟁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그리기보다는, 여섯 살 순이와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낯설지만 정감 있는 강원도 사투리로 그린 1950년대 풍경은 전쟁의 상처와 아련한 추억을 동시에 되새긴다.

인민군과 국군으로 나뉘어 전쟁터에 나간 순이 아버지의 형제들, 군복 수선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순이 어머니, 폭력을 일삼는 순이 아버지. 여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순이의 집엔 3대가 함께 산다. 순이 할머니는 밖으로만 떠도는 큰아들과 인민군과 군인으로 나뉘어 불려간 뒤 소식을 모르는 아들들, 점잖지만 걸핏하면 할머니를 무시하는 할아버지와 돈 번다고 자신을 업신여기는 며느리 탓에 외롭기만 하다.

이런 할머니에게 손녀 순이는 유일한 말벗이다. 미제 껌과 크레용을 부러워하며 미국을 동경하는 순이의 모습을 통해 당시 시대상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쉽게 읽히지만, 인물마다 상징을 부여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순이와 순이 엄마, 순이 할머니로 대변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시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

순이 엄마가 할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에게 반항도 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읽히기도 하는데요.

"1930년대와 1950년대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어요. 6.25를 거치면서 새로운 여성, 경제력을 가지는 여성이 나온 거죠. 할머니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제도화되지 않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순이 엄마는 전쟁 후 남한에 들어온 자본주의 시스템, 혹은 그 시스템에 편입된 세대를 말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죠. 순이 엄마가 인디언 죽이는 영화를 보러 다닌다거나,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머리를 하는 건, 미국식 문화와 자본주의가 성정에 맞는 인물이라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죠. 순이 친구 영이가 천주교 성당에서 살고, 순이가 외국인 신부를 참 동경하죠. 여기서는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한국인을 지배하는가, 그런 걸 말하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백미는 소설 중간 제사를 지내는 부분과 후반부 장례식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겪어낸 세대만이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사는 가부장제의 최고의 틀이죠. 어떻게 여기서 여성이 소외되는가, 남자가 가부장으로 부각되는가 의도적으로 점 찍듯이 쓴 거죠."

이 책이 출판사 청소년문고 시리즈에도 포함되었지요? 성장소설을 염두에 두고 쓰신 건가요? 쉽고 빠르게 읽힙니다.

"애초부터 염두한 건 아니었고, 쉽게 읽혔다면 순이라는 인물 때문이겠죠. 전 문자는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철저하게. 그 도구를 통해서 인물을 형상화하고, 독자가 인물을 충분히 자기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소설, 전 그게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여백을 가진 소설이 독자를 존중하는 방식이죠."

그리움과 존중과 사랑으로 쓴다

소위 '젊은 작가'라 말하는 등단 10년 차 내외 소설가들의 작품과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2000년대 발표작'으로 묶어 소개하는 것은 좀 멋쩍은 일이다. 이들이 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점은 그들이 통과한 시대와 겪어낸 경험만큼이나 다르다. 젊음의 패기와 세월을 살아낸 이의 원숙미 차이일 수도 있겠다. 작가 이경자의 소설 역시 그러할 것이다.

여성주의 작가로 한 때 가부장제 투쟁 이야기처럼 느껴진 그녀의 소설은 이제 따뜻한 삶의 관조로 비춰진다. 작가는 "내 소설 속 인물을 나무처럼 그리고 싶었다. 나무는 투쟁적이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 애쓴다"라고 말했다. 이는 작가의 전작 <빨래터>를 쓸 때부터의 변화다.

"수십 년을 쓰면서 깨달은 건 독자를 긴장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거예요. <절반의 실패>는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었지만, 절반의 독자를 긴장시키잖아요. 작가로서 문제의식은 더 깊어졌지만, 삶 자체에서 주제를 가져오고 의미를 발견하는 글을 쓰려고요. 화가 박수근이 생명자체가 갖는 무늬, 켜에서 자기의 그림 방식을 획득했듯이."

작년 초 <빨래터>를 낸 후 가진 인터뷰에서 작가의 노트를 구경한 적이 있다. '순희의 천국'이라고 적힌 취재 노트에는 수십 개의 작은 제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번 신간은 그 노트로 빚어낸 이야기다. "1년 만에 쓴 작품이냐?"는 질문에 "2006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란 대답이 나온다.

"소설은 암탉하고 비슷해요.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크기가 각기 다른 알이 주렁주렁 있어요. 내일 나올 알, 그 다음 나올 알들이 잔뜩 있죠."

<순이> 책의 첫 장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리움과 존중과 사랑으로 쓴다.' 작가 이경자의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