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SF의 상상력> 저자 최석진한국, 일본의 20~30년 전 답습… 환경, 재개발 등 '온고지신' 삼아야

최석진의 <일본 SF의 상상력-정치∙사회∙한국>은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1988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반딧불의 묘>를 분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와 집을 잃은 어린 남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붕괴된 일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전쟁을 감상적으로 다루고, 일본을 피해자처럼 묘사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저자는 거의 정설처럼 되어버린 이런 평가에 반기를 든다. 근거는 감독이 섬세하게 장치해 놓은 각종 아이러니들과 일본 개봉 당시의 정황.

아버지가 지위 높은 군인이었고 따라서 전쟁 산업의 호황 속에서 특혜를 누리던 계층이었다는 점은 남매가 서민이었던 친척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남매가 유산인 은행 예금을 털어 비싼 물건을 사고, 공습경보 속에서 즐겁게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서민들의 기준에서 보면 천진함과 바보스러움을 구별하지 못하는 게으름뱅이 그 자체"였다.

남매는 결국 피난갔던 친척집에서 나와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 전시 체제에서 형성된 밑으로부터의,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고립된다. 여동생은 영양 실조에 걸리지만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돈도 무용지물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1988년 고도화된 일본의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감독의 경고를 읽는다. 몇 년 후 실제로 거품경제가 터져버린다.

꼼꼼히 보면 이 영화에는 일본인의 피해자 의식보다, 그런 생각의 어리석음이 더 강조되어 있다. 전쟁으로 몰락한 상류층이 홀로 돈으로 소꿉놀이를 하다가 일본 패전의 뜻도 모른 채 죽어간 이야기인 것이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일본 내에서 진보적 성향의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좀처럼 깊은 수준의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감정은 일본 대중문화, 특히 정치사회적 맥락이 투영된 장르를 진지하게 들여다 보는 일을 어렵게 했다. 일본 대중문화는 단순한 하위 문화로, 유희적 성격만이 강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이다.

최석진이 그 점에 불만을 갖게 된 건 마니아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 문화에 이미 깊이 파고 들어 있는 현실임에도 무시하는 관행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러다간 "1980년대에 10대를 보냈던 세대의 경험 중 상당 부분이 영원히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절박함"까지 느꼈다.

"7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일본 대중문화, 특히 SF물에 대한 추억이 있을 거예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한 세대가 공유한 기억인 거죠. 그런데 정치 사회적 상황 때문에 하찮은 것으로 억압됐어요."

억압의 부작용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적 지식이 세대를 넘어 축적되지 못했고, 한국의 문화 산업 인프라도 그만큼 부실해졌다. 나아가 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중의 정치 사회적 상상력도 빈곤하다.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아바타> 등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국내에도 판타지, SF 장르 문화 산업을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지지부진한 건 규모나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가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해결할 기반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 점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가르쳐주는 부분이 있죠."

일본사회에는 대중문화의 기반인 출판과 TV 산업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작가들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고학력자들이 몰리고, 다양한 지적 사유와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녹여낼 수 있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일본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당대의 역사와 결부해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본에서 SF물은 공적 영역에서 다루기는 민감한 진보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영역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황 문제라든지 환경 문제 말이죠. 일본 지식 사회가 유럽과 미국의 상황에 열려 있었던 만큼, 세계적 흐름에도 기민하게 반응했고요."

<일본 SF의 상상력>은 이런 관점에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정치 사회적 지형 속에서 일본의 대중적 SF 문화를 새롭게 지도 그린다. 진지하게 복기하고 잘 배우자는 취지다. 저자는 한국의 상황이 일본의 20~30년 전을 답습하고 있는 만큼 일본의 옛 것을 돌아보는 일은 더 의미 있다고 말한다.

과연 환경과 재개발 이슈가 두드러진 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에는 최근 한국사회와 겹치는 데가 있다. 60년대 일본의 사회주의 학생운동의 한 흐름이었던 '전공투'에 대한 분석을 한국의 '386세대'에 적용한 사례도 있다.

더구나 사회의 변화가 나날이 가속화되는 현재, 급변의 충격에 대처하고 적절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 현황에 의심을 품고 미래에 질문을 던지는 SF적 상상력이 더더욱 필요하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을 했고, 노령화 속도도 더 빠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요. 최근 인터넷에 형성되어 있는 '환빠(환단고기를 기초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합친 광범위한 영역을 고대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이들)' 문화가 한 예죠. 한국의 SF적 상상력은 이런 식으로 뒤틀려 있는 겁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