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슬로푸드협회 회장 카를로 페트리니2010 슬로푸드대회 위해 방한, 한국 농촌 문화 중요성 역설

"매우 심각할 정도로 여러 가지 맛이 사라지고 있다. 이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은 농업의 문제고, 농업은 농촌의 문제이며, 농촌은 문화의 문제다. 문화도 물질 문화의 규모가 예술 문화보다 크다."

유럽회의문화위원회 위원장인 루치아나 카스텔리나의 말은 문득 우리의 아침 식단을 상기하게 만든다. 당신은 무엇으로 한끼를 때웠는가. 만족스러운 맛이었나, 그렇지 않은가.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발명하고, 심지어 많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잊혀지고 있다. 전 세계가 몇 달러짜리 햄버거에 익숙해진 지금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국제슬로푸드협회는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당시 푸드컬럼니스트로 일하던 카를로 페트리니는 다국적 기업 맥도널드가 세계인의 입맛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패스트 푸드의 반대 개념인 슬로 푸드는 '건강하고 정직하게 재배된 식재료에서 비롯된 진짜 맛'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그의 생각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범국가적 조직으로 발전하게 됐다.

현 세계 슬로푸드협회 회장인 카를로 페트리니가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10, 11일 남양주시와 사단법인 슬로푸드문화원,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에서 주최ㆍ주관한 '2010 국제슬로푸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카를로 페트리니 회장은 숱 많은 백발 수염에 체구가 위풍당당했다. 그는 환갑이 넘은 지금에도 약값으로 돈이 나가는 일이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국제슬로푸드협회 깃발
슬로 푸드 운동의 개념을 먼저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각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가지고 그 지역 문화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조리해 결과적으로 품질이 우수하고 출처가 분명하고 맛이 뛰어난 음식을 먹자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더 추가되어야 할 설명이 있나?

슬로 푸드는 특정 먹거리라기 보다는 음식 문화다. 음식과 환경, 멸종되어가는 식물의 보호, 땅과 농민을 존경하자는 것 등 음식 문화 저변에 걸친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맥도널드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시작해 현재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 패스트 푸드나 무분별한 식재료 교류 등과 싸우면서 개선된 점, 혹은 더 악화된 점이 있다면?

나아진 점이라고 한다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패스트 푸드에 대한 민감함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실질적인 음식 질의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 지구 상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120억 명 분이다. 그러나 세계 인구는 65억 명으로 이 음식의 절반은 버려진다고 보면 된다.

그런 와중에 10억 명은 굶고 있고 17억 명은 너무 많이 먹어 병이 났다. 음식의 분배와 질 향상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햄버거 같은 패스트 푸드는 사실 동양인들에게 훨씬 더 치명적이다. 1000년 가까이 섬유질이 풍부한 채소를 섭취해온 동양인들이 갑자기 지방질이 높은 음식을 먹을 경우 문제는 훨씬 더 커진다. 각 민족의 음식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방문이 처음이다. 한국은 지역 특산물에 대한 자부심과 국내 농산물에 대한 신뢰가 강한 반면 농사일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매일 새로운 건물이 서는 등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변하기도 한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슬로 푸드와 슬로 라이프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나?

한국에 도착해 그들이 바쁘게 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변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다만 한 가지, 음식이라는 것을 가격과 결부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그 가격에만 집중하고 있다. 음식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음식을 선택할 때 가격에 구애 받지 않는 것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능한가? 이것 때문에 슬로 푸드 운동은 간혹 소수 상류층을 위한 운동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나는 거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일반적으로 먹는 데 쓰는 돈은 수입의 11~12% 정도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최신형 휴대 전화를 산다든지 차를 구입하는 등 좋아하는 물건을 사는 데 쓴다. 나는 다른 부분의 소비를 줄이고 먹을 것에 좀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음식 먹는 것에 돈을 아끼면 나중에 약 값으로 더 많은 돈이 나가게 된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지역 농업을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 농민들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 마디로 절망적이다. 한국인들은 훌륭하고 전통적인 농업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존중하지 않아 지금 농촌에는 노인들 밖에 없다. 농촌에 젊은이가 없다는 것은 그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좋은 먹거리를 고집하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불하는 방법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대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든 돈이 없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동일하다.

런던 슬로푸드마켓
농민 보호와 문화적 상대성을 존중하는 데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지만 슬로 푸드 운동은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미식에서 시작된 듯하다. 맞나?

맞다. 정말 그렇다. 그래서 운동 초창기에는 미각과 미식이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다가 맛있는 음식을 가능케 하는 농민과 대지, 공정한 노동으로까지 저변이 넓어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해도 환경을 해친다면 그건 음식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미식가인가? 아까 먹는 데 지출하는 돈을 이야기했는데 스스로는 수입의 얼마를 음식에 사용하는지?

물론 미식가라고 자부한다. 수입의 18~20% 정도를 먹는 데 쓴다. 뭔가 특별한 걸 먹을 필요도, 많이 먹을 필요도 없다. 맛있고 깨끗하고 공정한 것만 먹으면 된다. 나는 약값으로 지출하는 돈이 거의 없다.

저서에서 슬로 푸드 운동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미각 훈련을 언급했다. 건강하게 자라난 식재료와 정성 들여 조리한 음식을 고집하는 것이 훈련에서 비롯됐다는 말인데, 본인의 경우 미식에 눈 뜨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나의 할머니가 그 계기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할머니들이 미각 훈련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은 손자와 손녀에게 혀가 즐거운 음식뿐 아니라 당장 맛이 없더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려고 한다. 최근 50년 동안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미각 교육이 거의 전무했다. 중요한 건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미각에 대한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국제슬로푸드협회에서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판단해 지난 한 해에만 이탈리아에서 1000개 학교를 대상으로 텃밭 가꾸기 등의 교육 사업을 펼쳤다. 직접 식물을 기르고 재배하여 맛 보는 과정에서 건강하고 출처가 분명한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싹틀 것이다. 내년에는 아프리카의 1000개 학교에서 동일한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이다.

각 나라를 다니던 중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 음식이 있었나, 아니면 슬로 푸드가 지향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는 음식이라든지.

민족마다 자기네들의 음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 가장'이라는 표현은 좀 곤란하다. 음식은 하나의 언어다. 음식에는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그 민족을 파악하기 위해 보는 것이 3가지 있는데, 첫째가 어떻게 먹는가, 둘째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셋째는 인간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이걸 보면 그 민족이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음식은 민족의 언어라고 말했는데 요즘 국제적으로 대세인 퓨전 음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퓨전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모든 문화와 정체성은 교류에서 시작된다. 토마토와 파스타의 결합 역시 활발한 교류가 낳은 뛰어난 산물이다. 토마토도 파스타도 모두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이 세상 어느 무엇도 혼자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퓨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 과장되거나 과도하면 안 된다. 퓨전이 과하면 컨퓨전(confusion:혼돈)이 된다.

지역에서 난 식물과 전통 조리법 등 문화적 상대성을 늘 강조하는데 요즘 한국은 한식 세계화를 앞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있는 그대로 나아가야 할지, 세계인의 입맛에 맞추어 변형해야 할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가.

이런 문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모두 한 차례 겪은 일들이다. 제일 좋은 것은 가능한 많이 바꾸지 않는 것이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여러 차례 한식을 접해 보았지만 직접 한국에 와서 먹은 음식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점점 사라지는 다양한 맛을 지켜내기 위한 방주(arK: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음식이나 식재료 중 방주에 담아 지켜내고 싶은 것이 있나?

사실 방주 프로젝트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소규모의 고품질 농산물을 보호하는 것에 기본을 두고 있다. 한국 식재료 중 어떤 것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정보가 없다. 이는 슬로푸드협회 한국지부가 해야 할 핵심적인 과제다. 어제 임지호 조리장이 운영하는 '산당'에서 처음으로 한식을 제대로 맛보았는데 모든 음식들이 너무나 놀랍고 훌륭했다. 특히 마당에 놓인 장독대는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문화라고 생각한다.

향후 국제슬로푸드협회의 운동 방향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달라

아무 자본도 없이 시작했지만 현재는 163개국에 퍼져 있다. 앞으로는 젊은이들, 학교,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해 젊은 세대들의 공감을 사는 데 주력하려고 한다. 오는 10월21부터 25일까지 이탈리에서 테라마드레 행사가 있다. 여기에도 163개국에서 슬로푸드를 지지하는 자들이 참여해 힘을 모을 예정이다.

일상 생활에서 가볍게 해볼 수 있는 미각 훈련이나 또는 슬로 푸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작은 실천 방안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세 가지를 권하고 싶다. 첫째,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볼 것. 둘째, 음식을 낭비하지 말 것, 셋째, 미각을 훈련하고 이를 자식들에게 전수할 것.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