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서 장춘, 길림으로 <송화강은 흐른다> 프로젝트 결과물 선보여

중국 하얼빈시 731부대 유적지 앞에서 김주영 작가는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비극의 현장에 왔다. 얼마나 많은 삶이 사라졌는데, 아직도 이름 못 찾은 영혼이 수두룩한 곳. 유적지 안 묘지도 그들에게는 안식처가 아닐 것이다.

작가는 광목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흐린 하늘로 올라갔다. 간소한 제사였다. 큰 배낭이 작가의 뒷모습을 덮고 있었다. 모아 쥔 손이 간절했다.

'노마드 작가' 김주영이 중국 송화강에 다녀왔다. 하얼빈에서 장춘, 길림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 독립운동의 한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의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731부대와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의 옛 터,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이 결성된 장소 등이 여정 안에 포함됐다. 일일이 기록하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송화강은 흐른다-회상 속의 상흔들> 프로젝트다.

히로시마와 시베리아, 비무장 지대까지 한국 역사의 상흔을 찾아 기억하고 어루만져 온 김주영 작가이기에 이번 순례가 유난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 더 애틋한 뜻이 있다. 작가가 추모하는 이들은 익명의 존재만이 아니다. 자신의 계보도 그 대상이다.

"신경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곳이에요. 아버지는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일본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죠. 문제는 아버지가 마오이스트였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고, 평생 사람들의 경계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살았지요. 아버지가 어떤 분이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머니는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송화강변 설치작업
작가 자신의 이름도 '본명'이 아니다. 어머니가 홀로 귀국한 후 새로 호적에 올린 것이다. 아버지는 현씨였다는 소문을 언뜻 들었다. 할머니는 종종 작가를 선영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고향이 강화도라는 말을 쫓아 그곳의 족보를 샅샅이 뒤졌지만 현씨의 종적은 없었다. 그땐 '빨갱이'로 몰리면 일가가 무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풍문이 김주영 작가를 키웠다. 혼자 있는 것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정처 없었다. 유랑은 자연스러웠다. 30대 초반부터 20여 년 동안 프랑스와 인도, 몽골 등지를 다니며 살았다. 그런 작가에게 노마디즘은 개성일 뿐 아니라 역사성이기도 하다.

이제껏 김주영 작가가 역사의 현장마다 올렸던 제의들이 그토록 절실했던 까닭을 알 것 같다.

"아버지도 어쩌면 731부대의 희생자일지 모릅니다. 어떤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었는지 모르죠. 중국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례의 마지막, 작가는 송화강으로 갔다. 지고 온 광목을 강변에 풀어 길을 만들었다. 먹물 발자국을 만들고 강가에 닿은 길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손을 모았다. 역사적 비극, 인류가 저지른 죄와 세대를 넘어 이어진 벌, 어머니를 침묵하게 했고 작가의 가슴을 가두었던 태생 등이 저 오래된 흐름과 더불어 지나가기를 바라며.

중국에서 돌아온 작가는 어머니의 유품으로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쓰던 장에 어머니의 옷가지와 편지, 성경 등을 넣고 수지로 굳혔다. 일종의 박제다. 어머니의 영정이자, 작가가 자신의 운명과 화해한 증표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유품과 나란히, 작가의 얼굴을 본뜬 데드 마스크가 붙어 있다.

왜 스스로의 얼굴로 데드 마스크를 만들었냐는 물음에 김주영 작가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니까"라고 대답하며 조용히 웃었다. 유랑을 업으로 삼기에는 작은 몸이었다. 송화강변에 마침내 배낭을 내려놓았을 때, 평생 말 못할 짐을 지고 살았던 어머니가 절로 생각났을 것이다.

저 역사적이고도 개인적인 순례의 결과물이 10월 8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한 쿤스트독갤러리에서 전시된다. 전시를 앞둔 10월 6일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김주영 작가를 만났다.

이번 프로젝트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나요.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제가 작업해 온 노마디즘이라는 주제의 연장선이면서, 개인사를 투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언젠가 한번쯤 해야겠다고 다짐했었죠.

어떤 장소를 찾아 다니셨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옛 신경의 역전마을과 아버지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장소들인 의열단 결성지, 731부대 등이요.

흔적이 남아 있던가요.

-역전마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명으로부터 추측한 장소에 가서 둘러봤지요. 한국의 달동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초라한 마을이었는데 마침 소박하나마 결혼식이 열리고 있더군요. 의열단이 결성된 곳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설계사무소가 되어 있었어요. 사장은 장소의 내력에 대해 모르더군요. 하지만 재미있는 건, 그 역시 의열단처럼 디아스포라라는 점이에요. 731부대 유적지에는 여러 자료가 남아 있었지만 온전하지는 않아요. 일본군이 떠날 때 건물을 폭파했고, 승전한 미군이 중요한 자료를 가져갔다고 해요. 남은 자료 외에 또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죠.

스스로 노마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신 계기가 있나요.

-80년대 중반에 프랑스로 갔어요. 답답함이 컸죠. 군부독재시절이기도 했고, 미술계가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저는 어느 쪽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파리에서 10년쯤 지내다가 인도로 갔어요. 부적을 태우며 작업하는데 좋더라고요.(웃음) 이후 몽골에서도 살았어요. 징기스칸의 후예들과 함께 양을 치면서요.

노마디즘이 곧 삶의 방식이셨네요.

-자크 아탈리는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유랑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해요. 생명이 수태되는 과정부터 그렇잖아요. 정자가 유랑을 거쳐 난자를 만나죠. 유랑하는 삶의 기본은 무소유에요. 징기스칸도 거처를 옮길 때는 그간 축적했던 것들을 주변에 나누고 떠났대요. 빈손으로 왔다 가는 거죠. 땅을 빼앗고 물건을 소유하는 문화는 정착 이후에 나타난 겁니다.

한국에 돌아오신 이유는요?

-2000년에 당시 85세셨던 어머니가 위독하셨어요. 마지막을 지키려 돌아왔죠. 어머니는 2005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 대해 더 알려주신 건 없나요?

-몇 번이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말도 하기 전에 숨부터 색색, 조여 들더라고요.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죠.

이번 작업을 하시면서 마음이 좀 풀리셨나요?

-아무래도 카타르시스가 있죠. 응어리가 짙었었는데. 너그러워지는 법을 저는 종교와 생태학에서 배웠어요. 인도에 갔을 때 힌두교를 접했는데, 교리가 재미있더라고요. 시바신이 보기에는 인간사가 개미 행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개미 입장에서는 나름의 역사가 있는 건데 말이죠.(웃음) 그래서 신과 개미의 시선을 오가려고 노력해요. 생태학도 마찬가지 교훈을 주죠. 제 아무리 욕망이 크고 문제가 많은 인간도 생태계 전체 속에서는 한 구성 요소일 뿐이라는. 요즘은, 자연스럽게 사는 게 좋아요.(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