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실종된 한국 사회를 향한 '생활 좌파'의 외침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작가 목수정이 새 책을 냈다. 신간 <야성의 사랑학>은 문제작이다. 거기서 다루는 문제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문제다. 시작은 '헌팅족'의 급감에 대한 의아함으로 시작한다.

"왜 한국 남자들은 더 이상 거리에서 그녀들을 쫓지 않나?"

목수정 작가는 한국 남녀가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될 때까지 들이 받는 '야성'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1999년 프랑스로 떠나 2003년 서울에 돌아온 작가는 3개월 간 단 한 차례도 길거리 '작업남'을 보지 못했고 어떤 '직관'에 의거해 한국 사회의 병폐를 감지하고 이 책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연애 걸기는 고사하고 지금 한국은 유래 없는 젠더 전쟁을 겪고 있다. 남자는 여자를 돈으로 사고 여자는 질세라 명품백을 위해 팔 수 있는 건 전부 판다. 온라인 상에서 남녀는 서로를 '찌질이'와 '창녀'로 부른다. 찌질이와 창녀가 사는 나라.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그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IMF 이후 빈부격차가 심해지며 8 대 2의 사회가 시작되고 비정규직은 연애를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제 살길 찾기에 바쁜 건어물녀와 초식남이 등장했으며 출산율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구성원들이 억압에 길들여져 있을 때에만 제대로 흘러갈 수 있는 사회는 연애에 너그럽지 않다."

이때부터 작가가 지목하는 범인은 '사회'라는 대상으로 넘어가고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을 억압하는 사회가 구성원들의 '생물학적 연애 충동에 손상'을 입혔다고 전제한 후 작가가 풀어 놓는 사회 문제는 그다지 새로운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습이 제거의 대상으로 올라오고 오래 이 나라를 장악해온 우파 정권, 그 구성원인 기성 세대들이 악의 축으로 거론된다.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역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여자, 자유, 평등, 사랑, 생명, 좌파, 범신론을 하나로 묶고 반대편에 남자, 서열, 전쟁, 파괴, 우파, 유일신으로 묶어 대립시키는 논리는 위험하다 못해 편협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책 속에서는 한국 사회를 완벽히 타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자유롭고 유연한 주장도 눈에 띈다. 효에 대한 강박, 그로 인해 오히려 늘어나는 패륜아들. "부모와 자식 간 관계가 취해야 할 당위는 사회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감정과 세월, 스킨십과 대화가 결정한다." '취향 없이' 룸살롱 여자들을 소비하는 남자들도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한국 여자들에게 팔을 걷어붙이고 남자들의 감수성 연마를 도우라고 촉구한다.

책을 낸 후 얼마 뒤 파리로 돌아간 목수정 작가에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다. 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 같은 공격성의 합당함에 대해 묻고, 이 한없이 자유롭고 위험한 여자에게 한국 사회를 사는 여자로서의 태도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야성의 사랑학>은 한국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지만 그 시작은 젊은이들의 연애 불능, 야성의 부재다.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게 한 구체적인 계기가 있나?

고작 4년 반 동안 떠나 있던 이 나라에 다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남자들이 길에서 첫눈에 반한 여자한테 커피 한잔 하자고 추근대지 않는다'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아마도 사랑에 대해 그토록 관대하고 열려있는 프랑스 사회에서 사랑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대해 충격 받고 때론 설득 당하며, 이 새로운 문화의 열렬한 관찰자로 지내다가 정 반대 방향으로 진화해간 한국 사회의 변화가 쉽게 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IMF 하에서 지내던 단 몇 년간 우리가 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회적, 생물학적 상처는 사랑이 싹트는 순간 작동해야 할 직관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흉내 내고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존재의 한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은 자아에 대한 인정이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은 우리가 최초로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 땐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바로 알게 된다.

자발성과 원초적인 야성에 기초하는 최초의 창조적 행위다. 자아로부터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실체가 불분명한 '사회', '이념' 에 대한 공격은 통렬하지만 개인을 향해서는 상당한 연민을 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집단에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는 방식이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했다. 매스 미디어에 의해 이토록 강력하게 포섭되어 있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지배계급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부단한 투쟁과 노력이 필요하다. 피지배계급이 갖고 있는 사고가 자신의 이해에 정확히 반하는 지배계급들의 그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에 대해서 공격할 수는 없다. 다만 설득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한국은 그야말로 '젠더 전쟁'의 정점에 와 있다.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남자 친구를 '등쳐먹는' 여자에 대한 풍자 코미디가 대단히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처우가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여성에 대한 비난이 더 커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녀를 만들어내는 건 괴로운 세상을 탓하기 위한 대상이 필요해서다. 대부분의 OO녀는 부정적인 현상을 반영하는데 바쳐진다. 잘 안 풀리는 현재를 여자들 탓으로 돌리려는 뿌리깊은 가부장사회의 근성이 이런 방식으로 돌출된다고 본다.

결혼한 남자가 일찍 죽으면 아내가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재수없는 년이 들어와서 남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한다. 언제나 잘못은 여자에게 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젠더 전쟁은, 그만큼 세상이 불평등해졌고 그 불평등의 가파른 계급의 하단에 위치한 남자들의 불만과 원망이 커져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분노, 무력함, 이에 대한 원망을 여자들에게 퍼부어 대는 것이다. 물론 소위 명품에 대한 맹목적 숭배, 성형미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처럼, 한국여자들을 싸잡아 비난할만한 현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들만의 현상이기보다 물질로 환산되는 인간의 가치가 여성들에게서 발현되는 방식일 뿐이다. 모순은 남녀 모두 같이 짊어지고 있는데 죄는 여자가 다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프랑스 남자와 함께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규범, 도덕, 관습 등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나?

머리로 가치관에 저항하는 것과, 눈을 보고, 몸으로 직접 익히면서, 행동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문화 정책에 대한 이상을 꿈꾸며 직접 프랑스에 와보고 싶었던 것도, 스스로에게 몸으로 채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1789년 혁명부터 68혁명까지, 거리에서 역사를 일궈나간 프랑스 시민들이 오늘날 그들에게 베푸는 일상적인 삶은 무엇인지. 그들이 이룬 정치적 혁명이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건, 책으로 읽기만 하고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달다. 프랑스에서의 몇 년간의 삶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날처럼 확고한 생활좌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책 중 여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남자들의 소통 능력과 감수성 연마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방법에 있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여자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면, 남자 또한 그러하다는 걸 나는 확신한다. 프랑스와 한국에서 소위 게이들을 많이 접했는데, 그들에게는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진 이들의 자유가 있었다. 창조적 영역에서 일하는 많은 남자들이 게이가 되는 것은, 남근중심의 사고가 그들에게 가하는 억압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창궐한 성산업은 한국 남성들의 성욕이 활발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갖는 성도덕의 억압성과 이중성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남자에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아니마(여성성)가 있다. 그러나 아기 때부터 그들의 여성성은 집안에서부터 철저히 억압당한다.

그들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질 권리를 인정해 주고, 여자의 영역을 좀 넘나들어도 '고추 떨어질' 일은 없으며, 넌 충분히 멋진 남자라는 사실을 말해줄 사람들은 여자다. 남자들이 아니마를 분출할 수 있게 하려면, 여성들이 그들 내면에 있는 아니무스(남성성)를 적절히 분출해줘야 한다.

데이트를 하고 남자에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요구하지만 말고 종종 남자를 집 앞에 데려다 주며, 명품백을 선물로 갖다 바치는지 여부로 사랑의 깊이를 재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저 강물에 내던져버리는 쿨함을 갖춘다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게 더 쉬워질 것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