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임혜경, 고별무대…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 활동 등 계속

하얀 튀튀를 입고 하늘하늘한 자태를 뽐내는 발레리나들은 여성성(femininity)의 상징이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발레리나는 의외로 소탈하고 격의 없는 성격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작품 속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부단히 겪어왔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싸움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고통이다. 거울 앞에 선 발레리나는 현실과 작품 속 인물의 차이를 냉정하게 자각해야 한다. 관객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완벽함을 위해서는 역시나 연습, 또 연습밖에 없다. 발레리나가 외롭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왕언니'인 수석무용수 임혜경(40)은 이 길고 긴 싸움을 16년간이나 지속해온 독한 발레리나다. 174cm의 큰 키 때문에 다른 무용수들에 비해 남자 파트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고충이나 국내 유일의 출산 후 복귀라는 이력은 그가 다른 어떤 무용수보다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언론의 표현이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다. 발레리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현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이나 신장, 출산 경험과 같은 조건으로 발레리나를 재단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고행을 하는 발레리나로 비춰지는 시선에 대한 경계 때문이다. "에이, (그 상황에) 닥치면 다 해요"라고 쿨하게 농을 던지는 그의 모습에선 천직으로서 16년간 발레를 즐겨온 '발레 달인'의 고집이 엿보인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고별을 선언했다. 이번 <라 바야데르> 공연을 마지막으로 유니버설발레단 무대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발레단 레퍼토리 중 최대 규모의 대작이라는 점과 예술의 전당이라는 좋은 공연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라 바야데르>라는 점이 그의 결정을 도왔다. 16년간 수많은 작품을 거쳐왔지만 <라 바야데르>는 임혜경의 발레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항상 함께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발 부상으로 오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만난 게 1999년 초연했던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 역이었어요. 이 공연을 통해 슬럼프도 떨쳐내고 수석무용수로 승급도 하면서 제 발레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죠."

이후 이화여대 무용과 학생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국 링컨센터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준 작품도 <라 바야데르>(2001)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국내 유일의 '아기엄마 발레리나'이기도 한 임혜경이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라 바야데르>(2004) 덕분이다. 각별한 인연을 가진 이 작품은 이번 무대로 그의 발레 인생에서 영원히 특별한 무대로 남게 됐다.

하지만 임혜경에게 이 한 작품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모든 작품이 다 특별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는 모든 작품의 캐릭터가 고루 다 잘 어울리는 몇 안 되는 발레리나이기도 하다.

"뛰어난 무용수도 잘 어울리는 역이 있고 안 맞는 역이 있거든요. 그래서 주요 작품을 다 못하는 발레리나들도 많아요. 그런데 저는 니키아뿐만 아니라 지젤, 오로라 공주, 오딜과 오데트 등 주요 작품의 캐릭터들이 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평을 듣거든요. 이건 정말 발레리나로서 '럭키한' 거죠(웃음)."

그가 다양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이유는 그의 발레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중심으로 '과시하는 발레'를 하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임혜경 발레의 강점은 뛰어난 표현력으로 관객과 교감하는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가 호평을 받은 작품도 대부분 <지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라 바야데르> 등 스토리텔링이 강한 발레들이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관객은 감동을 받지 못하거든요. 기본적으로 발레리나로서의 존재감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력과 자신감은 기본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발레단 후배들에게 이런 관록을 전수해주며 최고참 선배로서의 임무를 다해왔다. 자신처럼 장신의 발레리나 이상은과 최지원에겐 파트너와의 거리 조절을, 유부녀 후배들에겐 출산 관련 상담을 해주고, 특히 어린 남자 파트너에겐 선배로서가 아닌 '여자 파트너'로서 배려하는 소통을 한다.

1994년 입단 후 첫 주역을 맡았던 <라 손남불라(La Sonnambula)>에서 선배 파트너에게 그런 소통법을 배운 후 이원국, 황재원 등과 호흡을 맞추며 진정한 파트너링의 진수를 체득한 까닭이다.

이번 <라 바야데르>가 임혜경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유니버설발레단 무대에 서지 않을 뿐이고, 발레리나로서의 활동은 계속할 예정이다. 당장 내년 1월에는 일본의 미츠코마치모토 발레단에서 주역 공연이 계획되어 있고, 올해 4월 <현대춤작가 12인전>처럼 자신의 안무작도 기회가 닿는 대로 내놓을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의 고민은 올해 초 취임한 유니버설 발레아카데미에 가 있다. 한때 쇠퇴 일로에 접어들던 발레아카데미는 그의 취임 이후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의 교육철학은 '즐거운 발레'. 늘 좋은 컨디션일 수는 없기 때문에 부단한 연습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을 체화시켜야 아름다운 발레가 나온다는 생각이다.

어느덧 고별무대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발레는 어렵다고 말하는 임혜경.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한국의 발레리나로서 그동안의 고충이나 고별을 감상적으로 꾸밀 법도 하지만, 그는 예의 쿨한 그 성격으로 "그냥 시기에 맞게, 나이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거예요"라며 담담하게 웃는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의 발레 1막을 마친 그는 다시 공연장 밖에서 2막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이는 벌써 임혜경의 은퇴를 말하지만, 그의 발레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