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강남대 교수가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를 냈다. 1999년 등단해 2003년 첫 시집<사춘기>를 낸 그는 최근 10년간 국내 문학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녀가 첫 시집을 낸 것이 2003년, 황병승과 김경주, 김민정 등이 첫 시집을 낸 것이 2005년인데, 이 젊은 시인들은 이른바 '미래파'로 묶이며 이 말이 생긴 이래 줄곧 회자됐다.

2000년 전후 등단한 이들의 시는 그 새로운 감각만큼이나 새로운 읽기 방식을 요구하는데, '청록파', '시문학파'처럼 특징을 뭉뚱그려 짐작하기 또한 난해하다.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읽는 것이 정석이다. 일례로 한 시집 앞에는 이런 문구들이 붙었다.

'감각의 아나키즘'(강계숙), '시뮬라크르를 사랑해'(신형철), '얼굴과 이별하다'(함돈균).

감각이… 여쨌다고?

우리말로 쓰였지만, 무슨 뜻인지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문구들은 김행숙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에 관한 평론의 제목들이다.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로 태어난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빌려 이 문구들을 멋대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시인의 작품은 감각적인데 그 형식이 이전 한국시의 전형적인 방식과 다르다. 이른바 '아나키적'이다.(감각의 아나키즘).

두 번째,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네이버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모든 사건 또는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가리키는 철학 개념'이란 뜻이란다.

쉽게 말해 이 시인은 일상의 어떤 지점, 찰나에서 잡아낸 감각으로 시를 쓴다. 그리고 ('사랑'이란 말에 비춰) 이 감각, 느낌을 타인과 공유하는 지점, '공통감각'이 발생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찰나의 순간, 타인과 합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견이다.(시뮬라크르를 사랑해)

셋째, 얼굴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인데 이 얼굴과 이별한단다. 무슨 말인가. 1/75초(찰나)에서 '시적(詩的)인 것'을 포착하는 것처럼, 김행숙은 시 주체의 얼굴(정체성)도 시간처럼 쪼개어 바라본다. 그의 작품 속 주체는 하나의 완성된 자아가 아니라, 끊임없이 미분하는 자아다.(예를 들어 '내 마음, 나도 몰라'할 때 나는 이미 두 개가 아닌가) 유동하는 주체는 자신의 감성을 객관적 시선에서 관찰하는, 어려운 말로 '타자화'하는 오감을 갖고 있다.(얼굴과 이별하다)

어떤 작품이기에 이런 수사와 해설이 붙었을까. 시식용 빵처럼, 몇 작품 잘라 입에 담아보면 다음과 같다.

'혀를 내밀어봐. 멋진 활주로지. 몇 대의 비행기가 공중으로 뜨기 위해 달리네. 종종/ 도중에 바퀴가 녹기도해. 네 혀는 뜨거워// (…) 얘기를 좀 해줘// 맛에 대해서/ 네 체온에 대해서/ 목소리와 천둥에 대해서' (시 '혀' 중에서)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시 '이별의 능력' 중에서)

'전우처럼 함께했던 얼굴은 또 한 명의 전우처럼 도망쳤다. 끝을 모르는 고요한 밤의 살갗 속으로' (시 '얼굴의 몰락' 중에서)

등단 이래 '새롭다, 감각적이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쓴 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시에서는 '나'가 많이 등장하는데, 저는 등단 초반 '나의 자의식'으로 시를 쓸 때 활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내 경험이 대단한가?'란 생각도 들었고, 내 상처를 내세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요. 1930년대 이상과 같은 일련의 모더니스트들이 시적 전통을 부정했던 것과는 다른 거죠."

타인의 의미

그녀의 시에 트레이드마크처럼 소개되는 '감각'에 대해서 물었다. 감각이… 어쨌다는 겁니까?

"흔히 우리 문학작품을 논할 때 주제나 의미를 기준으로 해설, 소개하는 경향이 강한데 저는 감각, 의미, 내용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진 않거든요. 감각이 격렬하게 발생하는 순간에 의식도 같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사유와 감각은 연동되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이 저한테는 중요해요."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제목은 각 콘텐츠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연장선에서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를 읽으면 어떨까.

"두 번째 시집 쓰던 때는 (타자와 소통, 합일의) 가능성을 많이 생각했어요. 세 번째 시집은 불가능성을 담고 있죠. 너무 가까이서 뭘 보면 형체가 뭉개져서 안 보이잖아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는 대상을 파악하고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죠. 가까이 가면 갈수록 타인과 결코 합일할 수 없다는 이런 불가능성을 경험하게 되죠."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엎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시 '포옹' 전문)

'나의 발작이 시작됐다. 남은 의식은 누군가 숨겨놓은 비디오카메라의 것. 당신의 눈동자가 환해질 때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그러나 저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다 보여지지 않는다.'(시 '호흡2' 중에서)

"가까이 가는 것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게 '호흡'인 거 같아요. 얼굴에서 틈을 다 없애면 숨이 막혀 죽잖아요. 타자와 내가 아무리 거리를 좁히려고 해도 '호흡할 틈'은 남겨둬야 하는 거죠. 영화 정사 장면에서 치명적 합일을 꿈꾸며 목을 조르는 것, '호흡 멈추기'가 등장하는 건 그래서인 것 같아요. 어떤 불가능을 넘어서려는 욕망 같은데, 이번 시집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죠."

전문가들의 비장한 해설을 걷어내고 그녀의 시를 읽은 한 독자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기승전결의 단단한 구성, 세계를 구원할 것 같은 비장한 메시지가 없다. 시 주체에 나를 넣어도 되고, 너를 넣어도 되고, 나와 너 우리 모두를 넣어 읽어도 '읽힌다'. 독자의 상태와 컨디션에 따라 시의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자전거를 타고 읽을 때와 전철을 타고 읽을 때 같은 시가 다르게 보인다.)

다시 말해 시의 형태, 주체, 메시지를 '분석'하려 들면 끝까지 못 읽는다. 시의 문구를 빌려 누구를 가르치거나 세계와 대결하거나, 싸워서 이기려 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시가 아니다.(김행숙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투쟁'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고로 그냥 느끼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저 앞의 개별적으로 펼쳐진 전문가들의 감상처럼.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킁킁 짐승의 냄새를 맡듯이 책의 숨소리, 문체의 숨결을 느낄 때./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이 낭독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도 만질 수 없고 허공도 만질 수 없습니까. 지금도./ 지금도 이 책은 이 책입니까.' (시 '이 책'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