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첫 장편 로 올해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올해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황정은 씨가 선정됐다. 첫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로 이미 한 차례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첫 장편 <백의 그림자>로 두 번 만에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 작품이 민음사 문예지 <세계의 문학>에 실린 후였다. 아직 단행본으로 묶이지도 않은 작품을 두고도 당시 평단에서 호평이 쏟아졌다.(본지 인터뷰 시리즈 앙팡테리블 45번째, '내 소설 속 인물은 각자 쓸쓸해요'참조.)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일련의 '시국'사건을 쓰나미처럼 겪으며 20~40대 신인·중진 문인들이 '문학의 정치'를 한창 소리 높여 외칠 때, 그러나 정작 정치와 미학을 한꺼번에 구현한 동시대 문학작품을 찾지 못해 공허한 담론으로 문학과 정치를 구호처럼 쏟아내던 때 발표된 작품이라 문단 안팎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서울 재개발 지역의 상가를 배경으로 가난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우리 현실을 드러낸다.

시기를 잘 탄 작품, 혹은 평론가가 주목하는 이슈 때문에 행운을 거머쥔 작품이란 말은 적어도 이 수상작에 해당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미의식, 즉 '어떤 작품을 아름답다 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감상임과 동시에 사회적 경험과 훈련의 결과다.

장편 <백의 그림자>는 이 연장선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지만(기능성), 동시에 이야기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예술성)는 두 욕망 사이에 위태롭게 서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문학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해 읽는 것은 사과의 알맹이를 두고 사과 껍질과 씨를 먹는 일"이라고 했다. 이야기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은 그 모양 그대로 읽는 게 좋다. 이번 인터뷰는 수상작의 줄거리나 캐릭터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수상작가의 문학관을 듣는 데 집중했다.

작가는 "소설은 세계관의 미학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유행코드처럼 읽혔던 '환상성'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황정은은 불과 1,2년 만에 "요즘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윤리와 미학"이라고 대답하는 작가가 됐다.

물론 작가의 작품 경향이나 세계관이 전복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시야가 더 확장됐다는 말이다. 요컨대는 그의 이야기가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따라서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독자가 더 많아질 것 같다는 말이다.

수상작 발표 당일 일본여행 중이었다고 들었어요. 이메일로 수상소식 접했을 때 기분 어땠어요?

"죄송했어요. 여행 중이었고 연락이 잘 되지 않아서 담당하셨던 분이 고생하셨던 것 같아요. 죄송했다가, 짧게 기뻤고요."

제가 황정은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가 <백의 그림자>가 발표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당시 평론가들께서 이 작품을 많이 추천하셨어요. 그때도 첫 단편집과 소설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이 작품이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百의 그림자> 원고를 집필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그냥 배웠다기보다는 절실하게 배웠어요. 본래 소설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이런 법은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다만 소설을 단순하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겠구나, 싶었어요. <百의 그림자> 원고를 집필할 당시 목격했던 사회적 광경들에 아무래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소설과 세계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이런 부분들을 더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이 작품 탈고 후 쓴 소설이 5편이죠? 이전 작품과 달라졌다는 생각 드시나요?

"적당한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좀 거칠어졌구나, 싶은 부분이 있어요. 다섯 편이 모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골적으로 삿대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문학에서의 정치라는 것에 관해 고민을 좀 해보고 싶어요. (이전에는) 문학에서 정치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품을 선호했고, 또 그렇게 쓰기도 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치라는 문제가 밀접하더라고요. 요즘 같은 시대엔 나는 정치와 무관하다, 라는 입장조차 결국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정치라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일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도 노골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소설이 아무래도 사람 살아가는 일에 관한 작업이고 작가가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에 관해 세상에 대고 이야기하는 작업이잖아요. 적어도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의 정치성에 관해 이것저것 생각해볼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결국은 앞의 답변과 비슷한 답변이겠네요. 내 소설이 '소설로서' 세계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전보다 더 하고 있어요."

황정은 작가의 첫 단편집에서 많은 독자들이 '환상성'에 주목했죠. 이를테면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다든지(단편 <모자>, 애완동물이 주인을 평가한다든지(단편 <곡도와 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평단에서 황정은 작가의 장점으로 미문을 꼽습니다. 스스로 미학적 문장을 염두하고 쓰는지 궁금해요.

"아뇨 아뇨 아뇨. 제가 시적인 문장을 쓰는 건 아니고, '아름다운 문장을 써야겠다' 이런 생각도 없어요. 다만 '소설은 세계관의 미학적 표현이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좀 전에 말씀드린 정치적인 부분들, 고민들, 발언들이 문학으로 표현될 때 미학적인 부분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가진 '미학적이다'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주관적이어서 개념 정의조차 제대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말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암묵지 같아서 누구한테 표현하기가 굉장히 애매한 거군요.

"네. 굉장히 주관적인 거라서…. 제가 생각하는 시적인 문장은 수사학적 표현이나 문장 자체로 아름다우려는 노력과는 거리가 있어요. 그런 것 없이도 맥락으로 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는 문장들이 있고요, 그런 문장을 좋아하는 취향이 제게 있어요. 그래서, 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급적 말을 적게 사용해서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상황에 필요하지 않은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덕분에 대화를 쓰거나 문장을 쓸 때, 제로에서 플러스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제로에서 마이너스를 만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요."

좋아하는 작품에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등을 꼽았는데, 그 연장선으로 읽히네요. 세계관을 담은 미학적인 작품들. 이밖에 좋아하는 작가는 누가 있나요?

"프리모 레비요. 제가 생각하는 시적인 문장에 가장 근접한 작가가 레비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조세희 선생님의 난쏘공도 그렇고요. 프리모 레비는 시적인 문장을 쓰겠어, 라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데도 이미 시예요.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같은 작품을 보면 바로 그 상황을 가장 '근접한' 언어로 추출하려는 노력이 느껴지거든요. 아름다우려는 노력이 아니고. 번역한 분의 문장 덕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언젠가 레비를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첫 인터뷰 때와 지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첫 단편집이 '인간은 각자 고독하다'는 쓸쓸한 전경을 썼다면, <백의 그림자>에서는 그 쓸쓸함 속에 찰나의 연대가 느껴지고 지금 그 소통의 가능성이 더 커진 것 같고.

"뭔가 확장된 느낌이 들기는 해요.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고요. '아 사람 사는 게 왜 이럴까' 단편이든 장편이든 이런 생각을 계기로 쓰기 시작해요. 짠해서 써요. 예전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 작가 스스로 좀 발열(發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거 같아요. '따뜻한 소설로 위로를 주고 싶어' 이런 뜻은 아니고요."

<백의 그림자> 이후 작품들을 보면, 작가의 시야가 개인에서 사회로 넘어간 느낌이 들어요. 최근에 집중하는 주제가 뭔가요?

"말을 꺼내기가 좀 괴롭고 민감하지만 윤리와 미학. 집중하고 있다기보다는 관심을 두고 있어요. 세계가 왜 이 모양이 됐을까, 이걸 생각해보니 일단은 그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윤리, 이건 뭔가 많이 언급되어서 구태의연한 느낌조차 있는데 뭔가 많이 희박해, 이런 느낌 있어요. 물론 윤리라는 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특히 타자를 향해 들이댈 때는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지금은 기본적인 것들이 너무 무시당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어느 사회든 사회를 기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 사회는 그 시스템이 거의 부재하고, 지금 선 자리에서 되돌아보는 게 없어요. 나만 아니면 돼, 이 세 마디 말이 이 시절의 기본적 자세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