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박사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출간, 전통주 세계화와 품격 있는 음주 문화 정착 앞장

세상에, '술나라 헌법'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일반 국민의 음복을 증진하고 국가의 융창을 도모하며 세계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1927년 반포됐다는 이 헌법의 내용을 일부 옮기면 이러하다.

(제8조) 술나라의 작위는 공(空), 후(厚), 백(百), 자(自), 남(濫) 5등으로 하여 술잔을 잘 비우며 먹는 사람은 공작(空酌), 큰 잔으로 두둑이 먹는 사람은 후작(厚酌), 100잔은 능히 먹는 사람은 백작(百酌), 자기 손으로 부어 먹는 사람은 자작(自酌), 함부로 부어 먹는 사람은 남작(濫酌)이라 칭함.

(제13조) 사람이 술을 먹되 술이 사람을 먹지 않도록 할 것.

(제16조) 술을 붓지 않는 사람은 불경죄(不傾罪)에 처함.

(제22조) 국민당원의 보법(步法)은 지자(之字) 혹은 현자식(玄字式)으로 하여도 무방하되 공중교통을 방해하지 말 것.

일제 강점기 때 문인들이 만들어 구전되어 오던 것을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가 정리한 것이다. 반농담조 야사지만, 법의 형식을 빌렸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음주문화에 격과 도가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구한말까지는 소학(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도 음주 예절인 '향음주례'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음주문화에 대해 정식으로 배우지 않죠. 강권하고 폭음하는 술문화가 만연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술 박사'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가 <정헌배 교수의 술나라 이야기>를 냈다. 주당을 위한 지침서이다. 양으로 승부하는 사이비 주당에서 벗어나 술의 향과 맛, 멋과 정신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진짜 주당으로 진화하는 비법이다. 술을 빚는 기초 원리부터 시대에 따른 음주문화 변천사, 음주의 손익계산서와 술과 안주의 궁합까지 술과 인생 사이 무수한 변수들이 담겼다.

지식뿐 아니라 지혜까지 얻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 "참된 우정과 사랑이 세월과 함께 멋지게 익어가듯, 술도 세월과 함께 맛있게 아름답게 그리고 향기롭게 익어간다. 술이 자연스럽게 좋아지도록 하는 방법은 세월 속에서 오래도록 술을 묵히는 것이다. 숙성이 바로 그 방법이다."

'몇 년 산'이라는 수식어가 그저 높은 가격을 가리키는 세속의 술자리에서 시간을 견디는 고귀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멋모르고 들이켜 온 수백, 수천 리터의 술, 그로 인해 잃어버린 의식과 시간이 한꺼번에 스쳐가 허망하다.

정헌배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전통주 세계화와 품격 있는 음주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 왔다. 다양한 정부, 기업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음주문화시민연대를 운영했으며 2003년 정헌배인삼주가를 차려 스스로 술 빚는 전통과 원칙을 잇고 있다. 그의 술 철학은 이런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1984년이었어요. 프랑스에서 술 마케팅을 공부할 때였죠. 까미유라는 친구가 절 초대했어요. 식사를 마쳤는데 '파라디(천국)'에 갈래, 라고 묻는 거예요. 당연히 룸살롱이나 디스코텍에 가는 줄 알았죠(웃음). 그런데 지하실로 내려가더라고요. 파라디라고 쓰인 문을 열자 술 저장고가 나타났어요. 그중 한 술통에서 술을 따라주며 그가 말하더군요. '이 술은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담그신 거야.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라고'. 그날 마신 술 한 모금은 그냥 술이 아니었어요. 까미유 그 자체였죠."

이 경험이 정헌배인삼주가의 주문생산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고객들이 선택한 날이 술의 생일이 된다. 그로부터 최소 3년, 인내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리고 오래될수록 어떤 맛과 향이 날지는 미지수다. 인생과 비슷하다. 사람도 온갖 고락과 자연의 섭리가 빚어낼 앞날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정헌배 교수는 한술 더 떠 후대에 100년 넘은 술을 물려주는 게 꿈이다.

"박사는 무슨, 선무당이죠(웃음)." 하지만 술과 더불어 익어가는 시간의 가치를 알고, 술을 통해 다음 세대까지 내다보기에 그는 진짜 술쟁이다. 지침은 믿을 만하다.

1월27일 정헌배 교수를 만났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음주문화에 대한 교양 강의를 바탕으로 했어요. 전문가가 없다 보니 제가 학교 안팎에서 강의를 해 왔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이런 분야에 대한 요구가 있더라고요. 주류 산업이 정착하기 위해서라도 음주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제 강점기 전에는 소학 학생들도 음주 예절을 배웠다는데, 음주도 그만큼 일찍 시작했단 뜻인가요?

"15세 전후에 결혼을 했고 어른이 되는 시기가 일렀으니까요. 제사 때는 모두가 술을 마셨어요. 가볍게 취한 상태가 조상과 통하는 상태라고 생각했죠. 음주에 음복의 의미가 컸어요."

'술나라 헌법'이 재미있어요. 술자리에서 꼴불견인 '십불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중 가장 공감하시는 유형은 뭔가요?

"술 먹다가 딴 좌석에 가는 자, 이지요. 옛날에는 머슴이나 기생이 아니라면 술을 들고 옮겨 다니지 않았어요. 술은 윗사람에게 올리는 문화였고, 촐싹대는 분위기가 아니었단 거죠(웃음)."

정작 교수님은 술에 약하시다면서요?

"그래서 오히려 술을 연구할 수 있었어요. 술에 약한 사람이 술 연구자가 되는 게 세계적 현상이에요(웃음).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은 술과 적절한 거리 두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술로 맺은 인연이 많을 것 같은데요.

"술로만 살았으니까요(웃음). 프랑스 유학 시절의 은사 르비앙 교수님, 전통주 산업에 대한 꿈을 함께 꿨던 국순당 배상면 회장과의 만남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죠. 르비앙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전 세계 술 마케팅에 대해 연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국순당에는 기대가 컸죠. 대기업과 영세기업으로 양극화된 국내 주류 시장의 중간 지대가 되어주길 바랐거든요."

정헌배인삼주가가 있는 안성시 일대에 술 테마파크를 만드신다고요?

"음주문화라는 게 산업적, 기술적 기반은 물론 대중적 공감대가 있어야 건강하게 형성될 수 있는 거잖아요. 인삼주 원료를 재배하는 농업적 기반과 생산 설비에 전통주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교육·홍보 프로그램까지 갖춘 시스템을 구상 중이에요."

책에서는 정책적 지원도 촉구하셨는데요.

"전통주를 세계화하려면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 술의 가치가 인정받는 문화를 만들어야죠. 제 책이 보탬이 된다면 좋겠지요. 정부가 '삼백운동'을 지원해줬으면 해요."

'삼백운동'이라니요?

"100% 우리 원료를 사용한 고급술을 만들자, 100년 뒤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숙성주를 만들자, 100개 이상의 우리 술 업체들이 모여 주류 산업의 미래를 고민하자는 거죠."

술 빚는 이의 자질은 뭘까요?

"무지몽매해야죠. 술은 99%가 자연의 몫이고 1%만 사람이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아는 사람들은 아는 만큼 만들려고 하죠. 예를 들면 숙성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노란 빛을 띠게 되는데 시판되는 많은 술에 그 노란 빛을 흉내 낸 첨가물이 들어있죠. 술을 빚는 이라면 꾀 부리면 안돼요. 답답할 정도로 고집스러워야죠."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