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민병일 출간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8년간 사 모은 29가지 소품이야기 엮어

얼마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 씨의 기사가 쏟아지며, 문단 지인들의 후일담이 속속 소개됐다. 그렇게 소개된 문화예술계 인사 중 대중에게 낯선 이름이 하나 있다.

출판 편집자이자 시인인 민병일 씨. <실천문학>봄호의 기획 특집을 비롯해 각종 문예지와 잡지에서 박 씨의 미공개 사진, 자료 등을 찾을 때 민 씨는 섭외 대상 1순위로 꼽혔다. 얼마 전 그가 출간한 예술산문집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의 맨 앞, 그가 박 선생에게 쓴 헌사만 보아도 이 둘의 인연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선생님! 함께 했던 20년 세월을 아름답게 기억하겠습니다.'

독일 함부르크 벼룩시장에서

민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80~90년대 풍경이 그려진다. 90년대 그는 한 중견 출판사의 주간으로 박 씨를 비롯해 공지영, 곽재구, 허수경 씨 등 당시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집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박완서 선생이 출판사를 차려주겠노라 제안했을 정도이니 편집자로서 정점에 섰던 셈. 때로 편집을 맡은 책의 표지 디자인을 직접 도맡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1989년 <문학예술운동>지로 등단한 민 씨는 <여수로 가는 막차> 등 시집 2권을 내기도 했다.

민 씨는 그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다 훌쩍 독일로 떠났고,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사진작업과 대학 강연, 저술활동에 매달렸다.

"당시 저 자신이 너무 소모돼 있었다는 자괴감이 있었고, 문단에 대한 회의도 느꼈고요. 공부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이 컸지요. 처음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다가 업무 차 일본에 한 달 머문 후에 독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마흔을 목전에 둔 96년 홀연히 독일로 떠난 후, 2004년까지 그는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한눈 팔지 않고 시각예술 공부에 몰두했다. 신간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민 씨가 독일에 머문 8년 동안 부지런히 사 모은 소품들에 관한 이야기다. 램프, 몽당연필, LP음반, 진공관 라디오, 닭장 습도계, 칼, 몽블랑 만년필, 타자기 등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모은 29가지 소품 이야기가 그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펼쳐진다.

"독일에 있는 동안 거의 매주 주말마다 벼룩시장을 찾았어요. 집에서 먼 벼룩시장까지 가기 위해서 자동차를 구입했고요. 벼룩시장에 한 쪽에서 고서(古書)를 팔아요. 편집자인 제 눈에 그 책들이 얼마나 황홀해 보였겠습니까?"

그에게 벼룩시장은 독일의 문화와 예술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었다. 그는 무쇠촛대, 맥주잔, 그림, 포도주, 연필깎이를 살 때마다 물건을 파는 주인에게 무슨 용도로 썼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그 속에 깃든 이야기를 묻곤 했다.

벼룩시장은 철 지난 사물과 사람이 만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서와 독일 문화가 윤회하는 놀이터였다. 독일의 물건들을 밑천 삼아 유럽의 문화예술사, 국내 문화계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다.

'벼룩시장의 잡동사니 틈에 있던 옛날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을 발견했을 때 조금 흥분이 되었다. (…) 내가 아끼는 물건 중에는 어머니의 젊은 날 흑백사진, 어머니가 원산에서 시집올 때 가져온 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잇돌, 차 마실 때 애용했다는 일본산 쿠타니 찻주전자가 있다. 그것들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집에 있던 은으로 만든 칠보 쌍가락지인데 만년필의 은빛 촉감에서 그 은가락지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100페이지)

오래된 사물이 나에게 말을 걸다

시인이자 편집자이자 북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그에게 직함 하나를 더 붙여야겠다. 홍대 근처 그의 아파트는 세계 각지에서 사 모은 소품들로 작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서재에는 이번 산문집에서 소개된 소품 이외에도 70~80년대 출간된 국내외 비평서가 빼곡하게 꽂혀 있고, 침실에는 산문집에 실린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침대 옆에 있다. 민 씨는 필자 일행에게 해당화차를 주었는데, 3명에게 준 찻잔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건 지금은 나뉘어서 없어진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산 찻잔이고, 저건 소설가 오정희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잔이에요. 소설가 신경숙 씨와 함께 하나씩 받았던 거죠."

마치 벼룩시장에 나온 독일 할머니처럼 필자에게 조곤조곤 사연을 들려준다. 저자의 느릿느릿한 말투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묻어난다.

'오래된 사물들은 나에게 비루한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적 예술의 오브제로 다가왔다. 나는 그것들을 텍스트 밖에 있는 삶 속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5페이지)

그의 말투처럼 책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쓰였다. 독일 유학시절 벼룩시장에서 산 물건을 테마로 한두 꼭지 글을 끄적이다가 책상 속에 묻어두었는데, 문인들이 이 글을 본 후 책으로 묶을 것을 권유했다고. 에세이와 함께 실린 사진은 민 씨가 필름카메라로 찍고 스캔작업을 다시 한 후 책에 넣었다.

"제일 애정이 가는 소품은 몽당연필이요. 그걸 팔았던 분이 할머니였는데, 그 몽당연필에서 할머니의 생애가 느껴지더라고요. '그 연필을 난쟁이로 만들면서 할머니는 생의 무엇을 기록했을까? 삶이란 몽당연필처럼 줄어들어 추억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필자가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소품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데뷔앨범이라고 말하자, 민 씨가 김영욱의 다른 앨범도 많이 있노라고 소개한다. 시중에 도는 일반판뿐만 아니라 음반사 관계자들에게 주는 테스트용 녹음 앨범도 벼룩시장에서 발견했다고. 이 앨범을 비롯해 민 씨는 작은 박물관의 소품을 모아 두 번째 산문집을 쓸 생각이다.

"2권 분량 정도의 사물들 이야기가 준비돼 있어요. 그림에 관한 책과 한국의 창(窓)을 주제로 사진과 에세이를 엮은 책도 기획 중인데, 고풍스런 옛날 창을 찍기가 쉽지 않네요. 요즘에는 시골에도 알루미늄 창문이 많아서…. 오히려 폐가에서 옛날 창문을 많이 발견해요."

세상에 널린 많고 많은 사물 중에 인간의 '거대한 뿌리'를 품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그 오래된 물건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반추하게 한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담긴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