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임지현 한양대 교수 해외 발간… 국민국가 패러다임 극복, 새 인문학 연구 주도

"가장 관심 있게 본 최근 이슈는 아무래도 일본 지진 관련 기사죠.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고, 트랜스내셔널(탈국가적)한 시각이 상아탑의 학술적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각이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활동은 그의 말처럼 상아탑에 머물지 않는다. 1999년 계간지 <당대비평>에서 논의했던 '우리 안의 파시즘'은 2000년대 초반 담론으로 성장했고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대중독재> 등 그의 저서들은 제목 자체가 당대의 학문 패러다임으로 등장했다.

'대중독재'는 임지현 교수가 고안한 용어다. 그는 20세기 근대 독재가 '대중의 동의'를 통해 진행됐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소수의 독재자가 프로파간다를 통해 그로테스크한 독재 체제를 밀고 갔다는 도식적 해석에서 벗어나, 왜 대중이 그렇게 나쁜 체제를 지지하고 동의 했는가에 문제를 제기했다.

2002년 <대중독재> 1권이 출간될 당시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의 파장은 엄청났다. '한국 학계가 만든 세계적인 자생이론'이란 찬사와 '독재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란 비난을 동시에 받았고, 진보적 사회학자인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와의 '박정희 논쟁'은 신문마다 논쟁 일지를 보도할 정도였다.

이 논란은 이제 임 교수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 같다. 임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한양대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대중독재'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가 얼마 전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학술 출판사 팔그레이브에 의해 발간됐다.

모두 네 권으로 기획된 책 가운데 첫 번째 책인 는 20세기 유럽과 아시아에서 젠더 장치를 적극 활용했던 독재체제의 작동 방식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책 하나 번역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라고 생각할 독자도 있겠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문, 사회과학 저서 중 비서구권 학자의 이론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이 이론이 서구권에 소개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80년대 학생들이 찬미했던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처럼.

3월 17일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임지현 교수를 만났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곳이다. 대중독재 번역서를 비롯해 근황,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대중독재'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셨죠? 이 책 <대중독재와 여성> 국내 판이 나올 때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는 영어판이 8월에 동시 4권 출간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한 권이 출간됐네요.

"우리가 국제 학술대회를 오래 했기 때문에(대중독재를 주제로 2003년부터 6차례 국제학술대회가 이뤄졌다. <대중독재> 시리즈는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과 세미나를 토대로 기획, 진행됐다), 영어판 책 출간은 3년 전부터 기획됐어요. 이 책은 처음부터 영어로 쓰였고, 사실 한국판으로 번역이 된 거죠. <대중독재> 1, 2권은 영국 잡지에서 특집으로 두 차례 다뤘기 때문에 출간에서 제외하고, 나머지 4권 출간이 기획됐습니다. 이 책을 비롯해 일상에서 대중독재가 다뤄진 현상을 분석한 <일상의 욕망과 미망>, 근대의 관점에서 독재를 인식한 <대중독재의 근대성>, 과거사 청산을 다룬 <기억의 정치>. 앞으로 5권도 나올 거예요. 소설, 어린이용 책 등 문학작품을 토대로 한 대중독재 연구입니다."

대중에게 임지현이란 이름이 각인된 건 1999년 출간된 <우리 안의 파시즘>이 출간되면서 부터입니다. 이 책부터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대중독재> 시리즈까지 임지현 교수께서 출간한 책을 읽다 보면 하나의 포물선이 그려집니다.

"제가 계간지 <당대비평> 편집위원으로 있을 때, 1999년에 '우리안의 파시즘' 기획이 특집으로 나왔죠. 그때 저는 권력이란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게 아니라, 권력이 요구하는 것들을 대중이 자신의 욕망의 형태나 일상에서 이미 내장하고 있다고 봤어요. 그때 '일상적 파시즘'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후 DJ 정권 때 박정희기념관 설립 사업이 발표되고 진보학자들이 반대하는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도 그 진보학자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독재라는 건 소수의 나쁜 놈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나갔고 물론 비판했죠. 저는 그 심포지엄이 끝나면 한국사회가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할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더라고요. 누구는 그게 프로파간다 때문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이건 뭔가? 소수가 독재를 하는 게 아니고 독재에 대한 어느 정도 대중의 동의나 지지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럼 가설적으로 대중의 동의와 지지 아래 근대 20세기 독재가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대중독재'란 말을 써보자. 그렇게 그 말을 만들어 냈죠."

어떻게 보면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당면했던 비판의 돌파구가 <대중독재>, 그리고 <대중독재>에 대한 비판에 대한 타개책으로 '트랜스내셔널' 연구를 키워드로 잡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서로 다 통하는 개념이죠. <대중독재>가 유럽에 소개된 계기는 자신들의 역사에서 담지 못하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인데요. 가령 유럽사에서 독재 연구는 나치즘, 스탈린 연구 정도에 머물러요. 우리는 마오이즘, 북한 연구, 박정희식 개발독재체제, 일제식민지 시대 총력전 체제 등 다양한 독재체제를 분석했는데'대중독재'란 키워드가 놀라울 정도로 독재 코드를 아우르는 면이 있죠. 그리고 이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재 연구에 관해 트랜스내셔널 하다는 거죠.

분위기 좀 돌려볼까요? 임지현 교수께서 최근 가장 관심 있게 본 시사 이슈는 뭔가요?

"일본의 지진에 관한 뉴스죠. 저는 한국사회가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요. 예전보다 국내 반응이 훨씬 성숙했고, 이게 세계가 연결돼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다는 거죠. 예전 같았으면 일본에 지진이 생기면 우리가 현대차 많이 판다고 좋아했을 텐데, 지금은 우리 증시에도 영향을 미치고, 일본 경제가 무너지면 한국 경제도 무너진다는 인식이 있다는 거예요. 탈국가적 인식이 생겼다는 말이죠. 예전 국가주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본다면 '일본 놈들 싸다', '이제는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넘어설 기회다'라고 생각할 텐데, 이제는 '일본 지진 피해로 우리도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탈국가적)한 시선으로 볼 때 다른 해결책이 생긴다는 거예요. 내셔널 패러다임으로 현실을 이해했을 때는 그런 현안을 풀 수 있는 상상력이 갇혀 있어요."

국경을 뛰어넘어서

대중독재 연구 이후 임지현 교수가 몰두하는 분야는 트랜스내셔널이다. 철학, 역사, 문학, 사회, 정치, 문화 등을 특정국가의 경계에서만 바라보는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인문학 흐름이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트랜스내셔널리즘 연구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등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트랜스내셔널 주제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어떤 건가요?

"횡적, 종적 프로그램이 있어요.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 컬처럴 스터디죠. 연구 프로젝트는 연구원들이 개인적으로 하는데 매번 콘퍼런스를 하는 거죠."

최근 몰두하는 '트랜스내셔널' 연구가 사실, 서구 이론이지 않나요? 서구 중심의 사고를 뛰어넘자는 주장이 사실은 서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한계에 대한 지적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물론 서구중심이죠. 하지만 사실 내셔널리즘만큼 서구중심적인 게 없어요. 예컨대 역사학에서 한국의 주류담론이 뭔가요? '18세기 우리도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고, 실학이 나타났고,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일본제국주의가 들어와서 이걸 막았다.' 근데 왜 조선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거쳤다라고 생각하죠? 결사적으로 우리도 이런 자본주의, 계몽사상이 있었다는 걸 서양에 보여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일종의 헤겔이 말하는 노예와 노예 주인 간의 인정투쟁 같은 거죠. 결사적으로 보여주려는 민족주의는 서구중심적인 시선 아래 있는 만들어진 것이죠. 내셔널히스토리, 내셔널리즘이 서구중심주의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본인들은 모르는 겁니다. 그럼에도 겉으로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해요. 실제로는 자신들이 서 있는 패러다임이 서구중심이라는 걸 모른 채로."

일반 독자들이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에 관한 임지현 교수의 책을 읽을 때 혼란, 분열이 오거든요. 과거의 역사를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대문자 역사가 사라진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역사를 인식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생긴다는 거죠. 예를 들어 7살짜리 애한테, '역사를 의심해 봐라'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고구려 역사를 가르치기 쉽다는 거죠. 고구려 역사에 관한 인식을 나중에 뒤집을지언정, 그걸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거든요.

"근데 저는 7살짜리 애한테 고구려를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요. 그 꼬마가 실제로 그걸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역사가 외우는 과목이 되는 거죠. 전 오히려 1970년대 우리 아빠는 뭘 하고, 할아버지는 뭘 했을까? '할아버지, 그때 대통령 누구 찍었어요? 박정희가 독재정치하고 자유를 억압했다는데 할아버지는 왜 박정희 찍었어요?' 그렇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데서 역사관이 시작된다고 봐요. 오히려 역사교육을 시작한다면 진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구려, 팔만대장경을 가르치는 건 내셔널리즘을 내면화시키는 장치들이죠."

대중독재 프로젝트는 이제 책으로 출간하는 일만 남은 것 같고…. 이제 임지현 교수, 개인적으로 몰두하시는 주제는 뭔가요?

"저는 빅팀 마인드 내셔널리즘(victim mind nationalism,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제가 만들어낸 용어에요.

2003년 출간한 코넬대 사카이나오키 교수와 대담집 <오만과 편견>에서 읽은 개념과 겹치는데요. 그때는 '집합적 유죄', '세습적 희생자의식'이라고 말씀하셨죠. 일본이 식민주의의 세습적 가해자이며 그래서 모든 일본인은 '집합적 유죄'란 한국인의 심증이 한반도 내셔널리즘의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정당화시켰다는 의미로.

"네. 지금은 훨씬 발전됐고요. 2007년도에 <요코 이야기> 사건을 겪으면서 생각이 더 발전했죠. 요코가 북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체험기를 쓴 책. 그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고생한 이야기를 쓴 건데, 실제로 다 일어난 일이잖아요. 근데 왜 그때 한국인들이 책 출간에 대해 그렇게 분노했을까? 한국인들이 가해자로 설정돼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국인의 머릿속에 가해자는 일본인데. 그런데 일본도 자기들이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이자 유일한 희생자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태평양전쟁으로 한정하고 자기를 미국에 의한 원자폭탄 피해자라고 강조하고, 자기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하니까 한국에 사과하지 않는 거죠. 희생자가 어떻게 사과를 해?란 인식이 있으니까.

이스라엘 젊은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청소년들, 인디파타에게 총 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자기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다시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하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저 정도 희생은 필요하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로 600만이 죽었는데' 하는 인식이 있는 거죠. '죽은 팔레스타인인은 100명도 안 되네' 하는. 저는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를 키워드로 이걸 연구하고 있어요. 이것도 트랜스내셔널한 연구죠. <요코 이야기> 출간 때 한국인들이 보인 내셔널리즘, 일본의 내셔널리즘, 이스라엘의 내셔널리즘 등등 놀랄 만큼 닮아 있어요."

선생님께서 천착하는 담론을 따라 읽다 보면 사회에서 파편적으로 발생하는 사건, 이슈를 해석하는 혜안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관심 있는 학계 이슈는 뭔가요?

"역시 관심 있는 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입니다. 사카이나오키 교수 초청으로 2월에 코넬대를 방문했는데, 그때 놀라웠던 건 이런 풍경입니다. 일본 사상사를 4~5명이 발표했는데, 일본 텍스트만 읽는 게 아니라 브라질 남미 문학, 일본문학을 연결해서 일본 사상을 연구했더라고요. 역시 일본 노농파와 일본 마르크시즘,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시즘을 연결해서 읽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특정 지역의 연구자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거죠. 중국사를 이해하려고 해도 몽골 자료, 터키 자료 등 중국 주변 집단이 만든 기록을 보지 않으면 중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중국에서 만든 기록만 본다면 중국 중심주의 시각밖에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까. 특히 몇 년 사이에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들이 다 바뀌고 있습니다. 예컨대 영문과, 국문과 다 없습니다. 샌디에고 대학 같은 곳에서는 영문과를 없앴어요. 그냥 디파트먼드 릭터레처(Department Literacutre, 문학과)에요. 거기 문학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요.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을 나누는 게 오히려 연구를 단절시킨다는 거죠.

학계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인데, 우리가 거의 동시에 (트랜스내셔널) 연구를 시작됐기 때문에 어깨를 겨루고 나갈 수 있다고 봐요. 우리도 트랜스내셔널 협동 과정이 생깁니다. 일단 한양대 대학원에서 실험해 보자, 그래서 '인문학 협동과정'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설명회 책자를 넘겼는데, 트랜스 내셔널이 큰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임지현 교수…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1959년 서울 출생.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논문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취득.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영국 포츠머스 대학, 영국 글래모건 대학, 미국 하버드 대학 엔칭연구소, 국제일본문화센터 등에서 연구.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해 왔다.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고 2004년부터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오만과 편견>, <우리 안의 파시즘>, <이념의 속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등.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