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정범 감독숨진 친구에 대한 애도와 자본주의 사회 극빈층 이야기 담아

뒷자리가 '125'로 시작하는 승철의 주민등록번호에 회사 사장이 난색을 표한다. 오늘도 취직은 물 건너 갔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되뇐 면접도 탈북자 신분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승철은 다시 밖으로 나간다. 길가에 현수막을 걸고, 담벼락에 포스터를 붙인다.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등을 스쳐가도, 자기 구역에서 '영업'했다고 깡패들이 죽일 기세로 쫓아와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넌 한 시간에 얼마 받냐?" "4천 원. 너는?" "난 5천 원" 탈북자들이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온 대가다. 변변한 직장도, 안정된 생활도 보장되지 않는다. 상당수가 허드렛 일자리를 전전하며 빈곤층을 형성한다. 팍팍한 삶이다. 어떤 이는 같은 탈북자를 상대로 '브로커' 노릇을 한다.

"탈북자 이야기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극빈층 이야기이기도 해요. 가족도 재산도 없는, 몸뚱이 하나만 남은 가난한 청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죠."

박정범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무산일기>가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이유다. 감독의 친구였던 탈북자 고(故) 전승철의 인생은 이주 노동과 양극화가 일반화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재개발로 황폐한 서울의 풍경도 고단한 삶과 겹친다. '사거리 너머 철거촌'에 사는 승철의 동선을 따라 무너진 집, 가난하고 낡은 것들이 밀려난 흔적,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가 불쑥불쑥 끼어든다.

폐허 속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은 승철이 겨우 한쪽 벽만 남은 집의 문을 열자 깎아지른 듯한 비탈이 나타나는 장면은 마음을 철렁하게 한다. 서울이라는 스펙터클은 얼마나 많은 낭떠러지를 감추고 있을까.

"로테르담영화제에 갔을 때 한 관객이 영화 속 배경이 어디냐고 물었어요. 자신이 알고 있던 서울이 아니라는 거였죠. 하지만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서울은 대로변에만 있어요. 사람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건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은 그렇게 소외되어 있죠."

지평선마다 초고층 아파트가 환영처럼 떠 있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한쪽에는 불야성이 다른 한쪽에는 음습한 그늘이 펼쳐지는 게임판 위에서 사람들은 박쥐처럼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고, 승철도 자신의 일부를 묻었다.

그래서 <무산일기>는 박정범 감독에게 위암으로 숨진 친구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또 다른 전승철들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 대한 성찰이다. "누군가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되는" 세상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영화는 4월 14일 개봉한다.

3월 30일 박정범 감독을 만났다.

'무산'이 어디인가.

-함경북도 무산(茂山)은 대표적인 유배지이자 접경지다. 많은 탈북자들이 무산을 거쳐 오기 때문에 일종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다. '산이 무성하다'는 지명이 무색하게 지금은 민둥산만 남아 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고, 화전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죽을 고비를 넘어 찾아온 서울이 승철에게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곳, 즉 무산(無産)의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

승철의 눈에 비친 서울이 무척 낯설다.

-그게 서울의 실체다. 나도 장소 헌팅을 하느라 서울을 속속들이 다니며 알게 됐다. 철거로 황폐해진 곳들이 탈북자, 극빈층의 상처와 맞닿는다고 생각했다.

시청 앞 광장의 스케이트장조차 환영처럼 보이는데.

-승철의 외로움이 드러나는 장면이어서 그럴 거다. 승철이 탈북자들을 돕는 박 형사를 기다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 겨울철 서울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을 찾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썩거리고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함께 원을 그리며 도는 그 스케이트장에 승철은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직접 승철을 연기한 이유는.

-내가 승철의 눈빛과 말투, 몸짓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덥수룩한 헤어 스타일은 일부러 만든 것인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승철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켜 떠 쳐다 보곤 했다. 불안과 경계의 표현이었다. 그의 아픔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표정을 그대로 가져오면 희화화될 것 같았다. 그래서 중학생들의 바가지 머리를 차용했다. 헬멧 같기도 하고, 방어적인 느낌이지 않나.

승철이 어항 속에 성경책을 넣어두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한 탈북자의 이야기에서 따 왔다. 그는 거리에 버려진 것들을 종종 주워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쓴다. 그에겐 아직 쓸모 있는 물건들인 거다. 금이 간 어항이 승철의 내면을 대변한다고도 생각했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승철은 계속 거리를 떠돌며 현수막과 포스터를 붙여야 한다. 그 광경이 매우 실감나게 담겼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누군가가 포스터를 붙이고 가면, 금세 또 다른 사람이 그 위에 다른 포스터를 붙이는 모습이 영역 싸움처럼 보였다. 한국 사람들이 탈북자들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거다. 막노동판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갈등이 빈곤 계층에서 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장면이 화제가 됐다. 승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가졌던 대상인 백구가 죽고, 그가 그 사체를 지켜 보는 동안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백구를 내려다 보며 승철이를 떠올렸다. 그가 저렇게 죽었지, 그럴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감정이 관객에게 전해졌나 보다. 많은 관객들이 그 순간 영화를 되새기고 고민과 고통을 함께 해 줬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산다>라는 작품이다. 강원도에서 상경한 동생이 자살하려는 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다.

구원의 모티프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자살한 친구가 있는데, 그때 그를 돌봐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 아팠다.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자주 생각했다. 영화로나마, 세상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우리가 우리를 치유하고 용서하자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배려하면 좀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