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 화백 '화업 50년 회고전'구상화 외길, 자연과 생명의 순리 탐구

원로화가는 쏟아지는 질문과 관심에 서툴러 하면서도 50여 년 화업의 무게와 색깔을 분명하게 전했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에 감개 어린 소회와 아이 같은 기쁨도 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월 29일부터 6월 말까지 대규모 회고전을 갖는 김종학(74) 화백이다.

일반에게 '설악산 화가'로 유명한 김 화백은 화랑이 앞다퉈 전시하고, 콜렉터가 선호하는 인기작가이지만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감개무량합니다.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것은 작가에겐 큰 영광이죠."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첫 전시로 '김종학'전을 여는 것은 화단의 추상회화 열풍 속에서 묵묵히 구상의 길을 걸으며 한국현대미술의 또 다른 맥락을 일관되게 제시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고 작가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있다.

이번 회고전을 위해 1950년대 후반의 과도기적 실험작부터 설악산 시대가 시작되는 1970년대 말 이후 최근까지 김 화백의 대표작 90여 점이 엄선됐다.

설악산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김종학 화백
전시 구성은 크게 설악산 시대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즉, 1950년대 후반부터 설악산에 들어가기 전인 1978년까지의 작품과 1979년 이후 최근까지의 작품, 그리고 큰 딸과 아들에게 쓴 꽃그림 편지 등이 선보인다.

1959~78년 작품은 서울대 미대 재학 때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것들로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과 실험, 그에 대한 회의를 갖는 작품이 주종을 이룬다.

이번 전시작 중 서울대 재학시절 그린 '추상-여인'(1959)과 앵포르멜(비정형) 계열의 '작품603'(1963), '추상'(1970) 등이 눈길을 끌고, 1966년 <제5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목판화 '역사'는 당시 국제판화전을 통해 세계미술의 흐름을 파악해야 했던 작가들의 상황을 말해준다.

김 화백은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판화와 전위적인 설치미술 작업을 시도했으며, 1977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뉴욕 프렛 그래픽 센터로 연수를 떠났다. 그는 서양의 추상미술을 동경했지만 정작 미국에서 제작한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정물'(1978), '남자 얼굴'(1978), '회색산'(1978) 같은 구상 회화였다. 동어반복적인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회의가 들었다는 게 이유였다.

1979년 가정불화를 겪으며 김 화백은 그해 여름 세상사를 등지고 도피하듯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이번 전시에서 '가족'(1979)의 우울한 얼굴, 짙은 녹청색조와 누런 해바라기의 '꽃밭'(1979), 어둡고 적갈색조의 '가을 석양'(1980)이 김 화백이 처음 만난 설악산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들어 '꽃'(1985), '숲'(1986), '잡초'(1987) 등이 남보라색이나 연녹색을 배경으로 하고 나비, 새, 풀벌레들이 등장했다.

"설악산에 봄이 되니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기 시작하는데 할미꽃 피는 광경을 보고 삶의 극한에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내게 너무 큰 위로가 됐고, 드넓은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보고 있자니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어요."

김 화백은 전위적인 실험정신과 추상의 논리를 버리고 꽃과 풀, 산과 달, 바람과 물을 선택했다. 일각에서는 "이발소 그림"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화두를 찾아 길을 나섰다.

"추상은 어휘로 몇 단어에 지나지 않지만, 구상은 자연의 변화처럼 무수한 어휘가 있습니다. 세잔이'자연은 사전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요."

그는 남성적인 힘찬 기운으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표현했으며, 그가 붓을 휘두르면 나약하고 여성적인 꽃도 선이 굵은 남성적 풍경으로 변모했다. 속도감 넘치고 대담한 원색의 붓질로 자연의 강렬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작업을 김 화백은'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 회화라고 정의한다.

김 화백이 그리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의 설악이라기보다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작가 자신에게 '내재화된 설악의 모습'이고, 설악산에 살고 있는 한 예술가의 내면풍경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재현된다.

이번 회고전은 설악산 풍경화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순환을 통해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자연의 순리를 보여준다. 봄 풍경에서는 싱싱한 생명력이 느껴지고, 대작 위주의 여름 풍경은 빽빽한 꽃과 풀들로 마치 숲 속 산소가 뿜어나오고 꽃냄새가 진동하는 듯하다.

꽃의 색채가 사라진 가을과 겨울 풍경에선 스러지는 것들의 애잔함과 설악산의 골격과 기세를 볼 수 있는데 추상적 조형미가 두드러진다.

설악산의 사계 풍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작품에 영향을 준 김 화백의 고미술 수집과 전통미에 대한 안목이다. 그는 20대 때부터 우리나라의 목기류, 도자기, 민화, 자수, 보자기, 돌부처 등을 수집했으며, 강원대 교수 시절에는 한국미술사를 강의할 수준이었다.

"목기 수집은 조형적 안목을 넓히는 데 영향을 주었고, 민예품과 민화는 화려한 원색의 꽃그림을 발전시키는 데 영감을 주었어요."

김 화백의 다양한 인물화와 '군중들'(1978), '얼굴들'(1978) 작품은 그가 수집한 문인석이나 돌부처 같은 석물류들과 무관하지 않다. 추사 김정희나 소나무 그림의 대가인 능호관 이인상의 고서화를 수집한 이력은 '겨울 풍경'(1998), '눈, 소나무'(2002) 작품과 연결된다.

김 화백은 설악산의 사계 중 일반이 선호하는 봄, 여름 풍경도 좋지만 점점 가을, 겨울 풍경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부활하는 자연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과 생명에의 의지가 내재돼 있고, 무엇보다 '산'의 자태를 온전히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앞으로도 설악산을 그리겠다"면서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사람'이 소재인 것은 가장 암울한 시기인 1978~80년대 작품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환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비쳐졌을 사람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겠다는 것은 작품의 변화이자 그의 내면의 변화로 여겨진다. 설악산이 그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었듯 이제 그가 사람과 시대를 품고, 응어리를 풀어가려는 것인가 보다.

김종학 화백은 설악산으로 들어가 설악산을 넘고, 새 길을 찾았다. 그의 풍경화는 설악산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의 산하, 보편적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설악산의 풍경을 통해 이 땅, 대지의 삶,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술은 이념과 편견을 넘어서는 '큰길'"이라고 했다. 그가 '큰길'을 지나 또 어떤 새로운 미술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