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영화 김태일 감독당시 '주먹밥 부대' '취사조' 등 40여 명의 이야기… 여성들 역할 재조명

"씨알데기 없는 짓이요." 광주민주화운동 때 '주먹밥 부대' 중 한 명이었던 이영애 아주머니는 김태일 감독의 인터뷰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그 일이 내 가족, 내 주변에 이렇게 치명적일 줄은 몰랐어요." "5월은 아픔이죠, 아픔밖에 없죠." 승낙한 이들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매년 5월만 오면 몸이 먼저 안다"는 이들의 마음을 여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김태일 감독과 아내인 주로미 조감독은 아예 광주 대인시장의 빈 집으로 이사를 갔다. 6개월을 살며 부탁하고 설득했다. 이영애 아주머니도 결국 두 손 들었다. "아이고 몬산다. 진짜 올해만 하고 안 하요."

다큐멘터리영화 <오월愛>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로 광주민주화운동을 재구성한다. 시민군에게 음식을 날랐던 '주먹밥 부대', 전남도청 내에서 밥을 지었던 '취사조', 이념 때문이 아니라 광주를 지키려 총을 들었던 '기동타격대'였던 이들의 증언이 담겼다. 책이나 정치공방이 아닌 일상 속에서 당시 경험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들여다본다.

40여 명의 이야기가 모자이크를 이룬다.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밤에 대해 누군가는 남은 이들끼리 '죽더라도 이름은 알고 죽자'며 통성명한 일을 꺼내 놓는다.

누군가는 "깨끗이 입고 죽어야 천당 간다기에 옷을 갈아입었다"고 말한다.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머니에 넣고, 유서를 썼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남아 있는데 어떻게 나만 나오냐?"고 되묻는다. 그게 '폭도'들의 진심이었다. "후회는 안 하는데, 솔직히 무섭더라"고 쓰게 웃는다.

30년 전이 여전히 생생하다. 많은 이들이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있다. 시체를 처리했던 이는 "아직도 잠들기 전에…딱 떠오른다"고 했다. 도청 취사조 여성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만 살아나왔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상무대 영창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

'폭도'라는 낙인은 생활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명예회복이나 경제적 보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올해까지 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 중 53명이 자살했다.

"2009년 광주에 사전답사를 갔다가 기동타격대 한 분이 자살한 걸 봤어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자신의 삶을 '공짜로 살아온 29년'이라 하셨다더군요. 그때 이 이야기들을 빨리, 잘 담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광주에 머물렀던 6개월간 세 분이 돌아가셨어요."

김태일 감독은 "광주민주화운동은 끝난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한국사회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요? 평범한 사람들이 엄청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드물어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트라우마가 있으면 가족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끊임없이 현재화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당시 자발적 참여와 연대를 뒷받침한 공동체 문화는 귀한 유산이다. 망월동 구 묘역에서 화원을 운영하는 이세영 씨는 "함께 했던 친구들과 이웃들이 있는 여기가 우리 가족묘"라고 했다.

"지나는 거리마다 어른들이 손을 내밀며 배는 안 고프냐, 안 덥냐, 담배 주면서 담배 쬐까 피어라잉…아마 그런 힘이 있었으니 내가 아무 의심 없이 도청까지 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그 뭉클한 기억은 화려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죽은 이들 대신 살겠다는 그들의 의지에, 주먹밥 부대의 근거지였던 시장 통에 숨 쉰다.

<오월愛>의 카메라는 "지금 다시 그때처럼 모든 걸 나눌 수 있을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시장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공식 기념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영애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 구성지게 불려진다.

"내가 그 노래를 거기서 배웠어. 이따금 불러. 그런데 부르다 보니 의미가 있어, 그 노래가." '씨알데기 없는 짓'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5월 12일 <오월愛>의 개봉을 앞둔 김태일 감독을 만났다.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인터뷰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상당히 많은 이들을 만난 것 같다.

"총 60명 정도 만났다. 그분들을 다 출연시킨 가편집본은 3시간 40분 분량이었다. 기존 자료를 통해 발견한 분도 있었고 당시 재판기록을 일일이 뒤져 찾아낸 분도 있다. 여성들은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 다행히 광주에서 만난 김성용 신부님의 소개로 당시 도청 취사조였던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참가자 중 상당수가 이미 돌아가셨다. 게다가 넝마주이, 구두닦이 등 가장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계층의 분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에도 가보고, 어른들이 많은 복지회관 등도 수소문해 봤는데 찾지 못했다. 어렵게 접촉한 인터뷰이들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상처를 건드려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너무 괴롭혀 드린 것 같다."

도움이 된 자료들이 있나.

"임철우 작가의 소설 <봄날>과 <5.18민중항쟁사>,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펴낸 자료들이다. 사회학자나 역사학자가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한 연구는 놀랄 정도로 없다.

아직도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많다. 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 중 상당수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는 소문, 시신을 비행기에 실었다는 군인들의 증언 등은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지금까지 가두방송 이외에 여성들의 역할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도청 취사조, 주먹밥 부대 여성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인터뷰하기가 어려웠다.

스스로 밥 지은 일을 총 든 일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27일 새벽에 도청을 빠져나온 마지막 취사조 여성들은 자신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간 시민군을 잊지 못했다. 그가 자신들 때문에 죽은 게 아닌지,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그런 시각이 여성들의 삶의 터전인 시장에 대한 조명으로 이어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대부분의 작품과 달리 일상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광주정신은 지금도 시장에서 삶을 지켜나가는 여성들에게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가능했던 건 광주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농촌 공동체 문화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그것이 이어지는 데가 시장이다."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둘러싼 갈등도 영화에 담겼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씁쓸한 현재 같았다.

"광주시내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적이 41군데인데 거의 보존이 되지 않고 있다. 전남도청 별관도 아시아문화전당의 문을 만들기 위해 일부 철거될 예정이다. 광주 내부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벌어져 왔다. 경제적인 목적이 역사적 가치와 부딪히는 것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 여러 5.18 단체들이 힘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생활이 피폐했기 때문에 이 사업에 경제적 기대를 거는 입장도 이해하지만, 나는 그곳을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로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월愛>가 '민중의 세계사' 연작의 첫 작품이라던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서구, 제1세계의 시선으로 쓰였다. 제3세계, 식민지,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이들의 시선으로 보는 역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국가들, 팔레스타인과 아프리카, 유럽과 남미 등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들의 목소리로 담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를 통해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넘어 미래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