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허용순, 독일 뒤셀도르프 발레단 지도 위원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 위해 방한

수석무용수 엄재용을 지도하고 있는 허용순 안무가
"자,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리허설이 끝나도 연습은 계속된다. 1시간여의 움직임 끝에 지칠 만도 하지만, 상기된 얼굴의 발레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작을 다시 가다듬는다. "그렇지, 그런 식으로!" 옆에서 끊임없이 어린 무용수를 북돋는 것은 아담한 체구의 안무가. 그녀의 지도에 따라 발레리나는 점차 동작을 세련되게 완성시키며 스스로도 만족한 듯 수줍게 웃는다.

젊은 무용수 못지않은 열정과 에너지로 연습실을 꽉 채운 이 안무가는 독일 뒤셀도르프 발레단 지도위원인 허용순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허용순은 주요 발레 공연의 리스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발레뿐만 아니라 현대무용과도 작업하는 일도 있다. 관객과 무용계 모두가 그녀가 창조하는 모던 발레의 세계에 매료된 까닭이다.

허용순 안무가는 선화예고 재학 중 모나코 왕립학교로 유학을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발레단, 스위스 바젤 발레단에서 활동해온 유학파 발레리나 1세대다.

당시 함께했던 이들이 같은 반 친구들이었던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 발레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네오클래식과 모던 발레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그녀는 국내에서도 주요 발레단들과 작업하며 클래식 발레에만 치중된 한국발레의 저변을 넓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모던 발레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
그런 그녀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오는 9일부터 4일간 열리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모던 발레 시리즈 '디스 이즈 모던(This is Modern) 2'에서 자신의 작품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를 선보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그녀가 미국 툴사 발레단의 요청으로 안무한 것으로, 국내에는 2008년 발레엑스포 때 툴사 발레단과 함께 내한했던 것이 초연이다.

국내 무용수들과 이 작품을 한 것은 이듬해 유니버설발레 II가 처음. 당시 단원들이 컨템퍼러리 발레를 주로 했던 서브 컴퍼니 소속이었던 만큼, 이번 공연은 허 안무가가 유니버설발레단의 최고 무용수들과 함께 보여주는 첫 번째 작품인 셈이다.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는 미국과 유럽에서 50~60년대 유행했던 TV쇼 형식을 차용해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허 안무가가 어머니를 위해 만든 발레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50년간 미용사로 일하며 내 뒷바라지를 해오셨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발레를 만들기로 했죠."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 무용수들의 의상도 그 옛날의 페티코트가 됐고, 내용도 위트와 로맨스가 있는 대사와 줄거리로 채워졌다. 작품 전반에서 나타나는 유머와 익살에 가민된 뮤지컬적인 요소들은 당연히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터키, 한국 등에서 관객과 평단의 고른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처럼 항상 고른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사람들의 감정에서 춤을 '뽑아내는' 허용순만의 예민한 감성이 꼽힌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소재로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 내가 느끼는 감정과 메시지가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전달되어야 하거든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움직임의 연결이나 호흡 하나하나에도 교감할 수 있게 안무하는 거죠."

감정 전달을 우선으로 하는 안무는 음악도 쉽고 대중적인 곡을 주로 선택하게 한다. 그가 즐겨 쓰는 음악은 영감을 자극하는 음악.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에서도 대중에 익숙한 피아졸라의 곡이 등장한다.

허용순의 인기 비결 중 다른 하나는 성실함이다. '재독 안무가'로 소개되면서도 그녀가 국내 발레 이벤트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데는 그 바쁜 일정을 다 소화하면서도 작품의 완성도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부지런함을 나타내준다.

"한국에서 초청을 하면 보통은 공연보다 2주 정도 먼저 들어와 준비를 합니다. '준비'란 여기서 공연 준비를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90% 정도 미리 완성시켜온 작품의 나머지 10%를 무용수와 맞춰가면서 채우는 과정이죠. 맞춰가면서 기존에 가져온 부분도 조금씩 바뀔 수 있거든요. 큰 작품의 경우는 한 달에서 6주 먼저 들어와 더 오랜 시간 공을 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중요한 안무의 철학은 '무용수가 행복한 춤'이다. 무용수들이 공연을 마쳤을 때 만족감과 자부심이 느껴질 때 이것이 그대로 객석에 전달되며 결국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공연이 된다는 생각 때문. "저도 무용수 시절 느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하는 공연을 위해서는 우선 무용수들이 춤을 추면서, 끝낸 후에 행복해야 하는 거죠."

2001년 첫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출연한 이후 자주 이 행사를 찾았던 허용순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안무가로 후배들과 한 무대에 선다. 올해는 항상 있던 멤버들 대신 신예들이 대거 등장해 대선배인 허 안무가에게 대견함을 느끼게 한다.

올해로 안무가로서 데뷔 10년째인 허용순은 안무가로서는 한창 아직 나이다. 이미 많은 수작들을 만들었지만 그녀가 꿈꾸는 작품이 있을까.

이에 허 안무가는 "어떤 특별한 작품보다는 언젠가 전막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잘라 말한다. 얼마 전 터키에서 한국음악과 터키음악을 가지고 함께 작업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털어놓은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컴퍼니와 함께 전막 공연을 소개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고 소박한 바람을 밝힌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바람은 당분간은 바쁜 일정 때문에라도 잠시 미뤄질 예정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를 비롯해 올해만 벌써 3편의 작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2013년까지 꽉 차 있는 스케줄에선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성실함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

"나는 반복을 싫어해요. 볼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모든 안무의 목표이고, 또 그렇게 해오고 있어요." 나라, 무용단, 무용수에 따라 예리하게 특색을 발견해 그것을 최대한의 매력으로 승화시켜온 허용순. 그녀가 많은 무용수들에게 '함께 일하고 싶은 안무가'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그녀의 안무 철학에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