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탱고 처음으로 가요계에 도입한 독보적 존재50여 년간 국내 가수 10명 중 9명과 작업한국음악 발전소, 헌정 공연 첫 주자로 선정

30kg. 바람을 뿜어내는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더구나 다리와 목 사이를 가득 메우는 크기는 마른 체구의 노 연주가의 품에 안겨 있기엔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안고 '바람의 노래'를 하고 난 후면 어김없이 다리의 눌린 자국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무겁고 정말 힘들죠. 하지만 음악에 미치면 무거운지 가벼운지도 몰라요."

주름진 아코디언은 언젠가부터 엄마 뱃속의 아기처럼 그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악기가 아닌 그 자신이 되었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 마음을 실을 뿐이다. 그,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아코디언과 함께 살아온 심성락(본명 심임섭·75)이다.

국내 가수 열 명 중 아홉 명과 작업을 해왔으니, 아코디언과 전자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살아온 지난 50여 년간, 그의 숨이 들어간 앨범만 수천 장이다.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부터 김건모, 유리상자까지, 그리고 영화 <효자동 이발사>, <봄날은 간다>, <인어공주>,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에서도 그의 '노래'가 들렸다. 그는 연주가 아닌 노래라고 했다.

부산에 살던 그가 서울에 와서 아세아 레코드사를 통해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한 것이 1966년. 색소포니스트 이봉조 선생과 함께 한 앨범 <경음악의 왕>이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는 좀처럼 녹음실에서 나와 무대 전면에 오르지 않았다.

2009년에 이르러, '심성락'이라는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발표한 앨범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70여 년 생을 살아온 노 연주자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한 장의 앨범에 평단과 대중은 그저 숙연해졌다.

어린 시절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일부를 잃고 한쪽 귀는 난청인데다, 얼마 전에는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로 왼쪽 발목을 다쳤지만 그 어떤 것도 그에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몸속으로 들어온 아코디언

음악을 좋아하던 형님 덕에 그는 일명 돌판으로 불리는 SP판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들었다. 그 음악이 자신 안에 켜켜이 쌓여 있어, 훗날 가요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이미 가요가 아니었다.

탱고를 처음 가요에 도입했던 그는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 수많은 작곡가와 가수들에게 '심성락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였다. 누군가는 논문을 쓰러 찾아왔고, 어떤 이는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그는 프랑스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르 갈리아노와 호흡을 맞췄다.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작곡가 피아졸라가 곡을 완성할 때마다 연주하거나 레코딩했던 피아졸라의 둘도 없는 음악동료다.

갈리아노는 심성락 선생이 연주해온 CD를 듣고는 '뷰티풀'이라고 찬사하며 협연에 흔쾌히 응했다. 함께 연주한 곡은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와 정훈희의 '꽃밭에서'다.

"인간이 아니고 귀신이데요? '꽃밭에서'는 내가 부탁했어요. '당신의 화려한 테크닉에 맞춰 노래 부르는 가수가 되어보고 싶다'고 내가 말했죠. 같이 차 마시고 사진만 찍어도 행복할 텐데, 같이 연주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하지만 그 행복감 뒤엔 말 못할 사연도 많다. 오죽하면 아코디언의 '아'자도 듣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같은 곡이어도 그의 연주가 가슴 저미는 뭉클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지극히 애수적이다'라고 말하더군요. 내가 무지하게 행복한 사람이면 그런 음악이 절대 안 나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 이 감정이 음악에 묻어 나오는 거죠. 아코디언이 내 몸속에 들어왔어요. 내 마음 그대로 나오는 거에요."

겉으로 보기엔 언뜻 화려하고 행복해 보여도 답답한 속내를 어쩌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음악인들을 적잖이 보아왔다. 50여 년 세월, 아코디언만이 알고 있을 심 선생의 영욕의 세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누구보다 예민해 음악을 할 수 있었다는 그의 담담한 말이 또 한 번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음악을 하려면요,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정열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바보도 되고 어떨 때는 천재도 되고 오락가락하는 게 음악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음악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음악 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악인이 없어요. 악인이."

다시 찾은 인연

최근 방송과 신문에서 그를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는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음악을 듣던 시간, 처음으로 아코디언을 만졌던 기억, 그때의 사람들까지 불쑥 그를 찾아와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인터뷰가 있던 전날 밤에도 그는 새벽 5시까지 깨어 있었다. 56년간 세월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코디언 거장, 심성락'을 있게 한 은인들이다.

부산 광복동에 자리한 애음당이란 레코드점은 부산의 명물이었다. 이곳의 배영복 사장 부부는 음악이 좋아 레코드점에 살다시피 했던 그를 가족처럼 챙겼고, 그곳에서 가요를 섭렵했다. 피란 시절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갈해준 사장은 애음당 안에 악기점을 차렸는데, 심 선생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아코디언을 만지고 독학했다.

부산KBS 노래자랑의 심사위원이기도 해던 갈해준 사장은 심 선생을 적극적으로 이 무대 연주자로 추천하며 본격적인 음악가 인생이 시작됐다. 그에겐 이곳이 음악적 둥지였던 셈이다. 이분들의 소식을 듣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의 주름 가득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얼마 전엔 기사 덕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부산의 명문고인 경남고를 자퇴하고 세션맨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학교에 누가 될까 모교를 밝히지 않았다. 데뷔 후에는 예명으로 바꾸어 경남고 동창들이 그를 알아볼 리 없었다.

다시 만난 동창들과의 해후는 종종 그를 고교시절로 데려가곤 한다. 뮤지션 심성락의 음악 인생이 평단과 대중에 의해 재조명되듯, 잊고 지냈던 과거는 개인의 역사 속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산KBS에서 노래자랑 사회를 봤던 박인필 아나운서가 심 선생이 20대 초반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박 아나운서의 풍채와 목소리를, 심 선생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51년 만의 해후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진동한다.

심성락에 헌정하다

이달 26일,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대중음악 전문공연장)에서 한국음악발전소의 주최로 <심성락 헌정공연-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공연된다. 가수 주현미, 최백호, JK김동욱, 적우, 소리꾼 장사익 등 유명 가수들이 심 선생의 음악인생을 기리기 위해 준비한 무대다.

가수 최백호가 소장을 맡고 있는 한국음악발전소는 헌정공연의 첫 주자로 심성락을 선정했다. 그동안 무대 뒤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가 무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심 선생은 이 같은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듯했다.

이미 3000여 석 객석의 80%가량이 빠르게 찼다. 동년배 음악동료이지만 자신의 콘서트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작곡가 김희갑 선생의 티켓 구매 소식은 그를 더 놀라게 했다.

헌정공연 소식이 고마웠지만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객석이 비어 처음으로 열리는 헌정공연에 찬물을 끼얹을까 봐서다. "공연이 실패하면 최백호 소장이 마음을 다치잖아요. 내가 제일 두려운 건 그거에요. 나는 괜찮아요. 이제 음악을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우리 최 소장 마음 다치지 않게끔 공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사실 그는 지난해 10월 '가요무대'를 마지막으로 연주 인생을 정리하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일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본 음악가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많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를 위해 노래하겠다는 이들이 노 개런티로 한날한시에 모이기로 했고, 그를 보고자 하는 이들이 객석을 채워가고 있다.

얼마 전 KBS 음악토크쇼,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에 출연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음악 앞에서는 마음이 허물어졌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공연에서 후배들과 좋은 연주를 하면서 느끼는 교감이 참 좋았다"는 그의 덤덤한 마지막 말 한 마디는 결국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무대 위 연주자, 객석, 그리고 눈물을 보이기 싫어 성급히 무대 뒤로 사라진 심성락 선생은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수 인순이와도 마주쳐야 했다.

여전히 음악은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번 헌정 공연에서 연주할 곡목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화 <봄날은 간다>를 편곡해 오리지널 곡에 이어 연주하고, 6.25를 기념해 가곡 '비목'을 연주하겠다고 했다. 탱고 무용수와는 탱고 음악으로 호흡을 맞춘다. 독주곡 외에도 후배 가수들과의 협연도 있다.

"난 정말 행복합니다. 나를 위해 모여준 그들에게 고맙고, 그 마음들이 날 더 오래 살게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주름진 그의 얼굴에 밝은 빛이 돈다.

심성락은…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심성락은 부산 경남고 재학 중 독학으로 아코디언을 시작했다. 부산KBS 노래자랑에서 아코디언 반주를 시작한 후 부산KBS 전속악단에서 활동했다.

군예대에서 연주생활을 이어가다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와의 만남을 계기로 김종필 총리의 전자오르간 교습선생이 됐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청와대의 공식 행사에서 전자오르간을 맡았다. 그가 작곡한 가요 세 곡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이미자가 취입하기도 했다.

※ 애타게 기다립니다
부산 광복동의 애음당 배영복 사장님 부부, 악기점의 갈해준 사장님과 그 가족분들을 찾습니다.
한국음악발전소(02-786-7865)로 연락 주시거나, 에게 메일을 보내주십시요.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