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만에 첫 연시집 '상화 시편'과 신작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펴내

국내 '다작 문인'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문학평론가 김윤식과 시인 김정환, 고은 등이다. 모두 30년 이상의 필력을 자랑하는데다, 쓴 책의 수는 100권을 훌쩍 넘는다.

그중에서도 고은 시인의 필력이 으뜸인데 자신도 정확한 숫자를 모를 만큼 시집을 펴냈다. 어림짐작하는 것은 160여 권. 그런 그가 지난 주 생애 첫 연시집(燕詩集)을 냈다.

부인인 이상화 중앙대 영문과교수에게 바치는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이 그것. 더불어 시인의 시적 전통을 잇는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가 창비 시선으로 함께 출간됐다.

생애 첫 사랑시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은 시인이 작품 활동 53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시집이다. 6일 들과 만난 자리에서 화제 중심이 단연 이 시집으로 모아진 이유다.

"아내에게 어떤 감동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내와 30년 가까이 사는 일상에서 사소한 티끌같은 시간의 집적, 시간의 도래 자체가 감동이었다"고 대답했다.

"80년대 사랑시를 한번 쓰려고 했는데, 아내가 말려서 그만뒀어요. 그때는 내가 (시국선언 등으로) 거리에 나와 있을 때였으니까 사랑 이야기 쓰면 위화감이 든다고. 그때 나왔으면 이것보다 더 좋았을 건데 많이 퇴락했어. 이건 그것의 잔재 같아요."

고은 시인이 아내를 만난 것은 1974년의 일. 열네 살 연하의 이상화 교수에게 편지를 받은 것으로 출발한 두 사람의 연애는 1983년 결혼으로 이어졌다.

'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 기어코 1983년 결혼 이래/ 아내의 긴 편지와 좀 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 황홀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의 편지는 아내의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나는 아내의 오른손이고 왼손이었습니다' (시 '아내의 편지' 중에서)

시집에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애달파하고 깨달음을 얻는 시인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시인의 소소한 일상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인이 되기까지의 세월, 사유의 과정을 담은 시 115편이 담겨 있다.

표지에 실린 그림 역시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 몇 해 전 아내의 생일에 그린 그림이란다. 이상화 교수가 쓴 시 '어느 별에서 왔을까'도 시집 맨 끝머리에 담았다.

시적 전통 잇는 신작 시

함께 출간된 <내 변방은 어디 있나>는 <허공>(2008)이후 3년간 써온 신작시를 모은 시집이다. 주지하다시피 시인은 1958년 등단 후 허무주의적 초기시, 현실 참여 저항시, 불교의 게송(偈頌)과 선시(禪時)의 전통을 잇는 단시(短時)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스펙트럼을 펼쳤다. 신작 시집에는 시인의 이 시적 전통을 잇는 시 114편이 담겨 있다.

시집 제목 '내 변방은 어디 있나'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이 시집에서 현재 문명에 맞서며 이 시대의 '변방'을 자처한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그는 언제나 자기 시대의 한복판에 서서 시대에 맞서고 시대를 넘어서는 시인이며 그 맞섬과 넘어섬의 방법으로 시대를 '위하고자' 하는 시인이다. 나는 이것이 고은의 시를 고은의 시이게 하는 발성법, 고은이 만든 '고은의 시적 전통'이라 생각한다"고 평했다.

'오늘도 내 발밑에서 / 고생대 화성암 층층의 억센 함구로 캄캄할 것 / 오늘도 내 서성거리는 발밑에서 / 바스라져 / 바스라져 / 쌓여 울부짖다 퇴적암의 굳은 포효로 캄캄할 것 / (…) / 이토록 지엄한 암석의 하세월로부터 / 내 고뇌가 와야 한다 / (…) / 이 모독의 지상 여기저기 내 석탄의 고뇌가 와야 한다' (시 '태백으로 간다' 부분)

시인은 석탄으로부터 곧장 수억년의 시간을 거슬러 고생대의 시간을 현재의 눈앞에 펼쳐 보이며, 그로부터 단숨에 시인의 고뇌가 와야 함을 거듭 다짐한다. 요컨대 시인은 한 작품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시간의 집적성과 찰나의 순간성을 동시에 담아낸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마찬가지다. 시집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시인은 "은유는 신의 것이 아니라 삶의 것이다란 준엄한 명제 앞에 서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예를 들며 비유, 은유와 같은 시의 언어는 영구불변의 수사법칙에 따라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감성으로 쓰여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시 언어가 통속적으로 2차 언어라고 하지만 그것은 1차 언어(일상어)로부터 유리가 아니지요. 일상언어야 말로 추상어의 출발점입니다."

<상화시편>에서 사랑이 테마로 나오는데, 어떤 보편성과 독자성이 있습니까?

"모든 행위는 사적(私的)이지요. 우리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어떤 상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인류 모든 창조행위는 사사로운데서 나옵니다. 사(私)를 모독하면 공(公)이 모독당하는 겁니다. 국가나 사회 세계 구성체 규범이 전부 공에서 나온 꿈이죠. 사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나중에 가면 분열되거나 전체주의로 가지 않습니까? 모든 인류의 아름다움, 진실의 출발점이 사입니다. 사를 존중해야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도 모독당하지 않습니다."

<상화시편> 감정이 부인인 이상화 교수를 향한 것이지만, 다른 대상에도 적용된다고 보십니까?

"사랑에 대해서 난 멀리 떨어진 이단자로 출발하지요. 하지만 사랑은 우리 둘 만의 것이 아니지요. 부부도 옛날의 교조적인 부부 관계는 아니잖아요. 다른 사랑의 가능성 같은 것도 여기에 스며들어 있지요. 이 사랑시편도 우리 둘만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시집을 읽어보면 부부간에 갈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난 무갈등을 인정하지 않지만 아내와는 아주 전범(典範)처럼 '무갈등 체제'입니다. 싸움이 성립되질 않아요. 하면 어느 한쪽이 슬그머니 없어져요. 부부싸움은 때로 아주 매력도 있고 때로 증오도 있는 것인데, 그래야 진실해지고, 근데 그게 아닌 게 되어버렸지요. 아내가 화를 내면 난 뼈가 없어지고 말아요."

일반 독자에게는 사랑시를 묶은 상화시편이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두 권의 시집, 시인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두 권을 유리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시인으로서 변방을 지키고 싶고 또 상화시편은 상화시편대로 다른 손에다가 양보하고 싶지 않고 그래요. 두 개 술잔을 쥐고 어느 술잔을 마실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