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CBS 라디오 PD 출간'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주제로 모은 인터뷰, 이야기처럼 풀어

'밤이 늦도록 편집하다 보면 어느 틈에 이야기의 내용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목소리의 톤과 빠르기가 들리지. 그런 목소리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마저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김연수 중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의 안미선은 라디오 PD다. 라디오부스에서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세한 결 사이 침묵 속에 어떤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이 아름다운 구절을 읽으며 '이건 단지 허구'라고 체념하던 찰나, 이 말을 실제로 해주는 이가 나타났다. 현실에선 이렇게 바뀌었지만.

"라디오의 특징은 한계가 주어진다는 거. 나는 보지만 청취자는 보지 못한다는 거. 이 한계를 의식하고 살았던 게 인간을 보는 시각 전체에 영향을 줬죠. 보이지 않는 곳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어요."

CBS 라디오 PD 정혜윤씨다. <김어준의 저공비행>,<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등 프로그램을 만든 그녀는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서점에 서평을 연재했고, 책과 여행, 사람에 관한 몇 권의 책을 냈다.

정혜윤의 글은 이야기와 책을 통해 타인과 감각을 공유하려 한다. 그러니 어떤 책이든 그녀의 눈으로 필터링 되면 그 책은 줄거리가 아니라 감성으로 요약된다.

때문에 그녀 앞에 붙는 수식어는 '매혹적인 독서가'. 서평을 쓰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작가, 서평꾼 등 책을 말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면, 정혜윤은 책을 읽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제일 빛날 때는 남의 말을 들을 때에요. 나는 참 잘 들어요. 이건 나의 능력이죠."

그리고 이 장점을 모아 얼마 전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란 책을 냈다.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란 주제로 모은 인터뷰집이다. 그녀가 '삶의 미세한 숨결을 담는 방식'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라디오 피디가 됐습니다. 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책 '친구를 찾아 떠나며 가난한 손님으로 살기'에 썼는데, 간단히 말해서 전태일 평전을 읽고 그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란 사실을 알고부터에요.

어쨌든 나는 라디오PD가 됐고 이 직업을 좋아했어요. 회사에서 내 별명은 '젖은 머리 여자'였습니다. 머리카락을 말릴 새도 없이 회사로 달려와서 일했거든요. 그렇게 뛰는 중에도 '오늘은 누구랑 방송을 할까' 설레었죠. 나는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방송국에 들어와서 배운 게 더 많아요.

인터뷰로 만난 사람 중에서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어떻게 그런데 관심이 있을까? 세상은 정말 다양하구나.' 나한테는 냉소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볼 때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 아이템으로 보게 돼요. 방송국 와서 나는 '기억 상실증 환자'란 말을 많이 들었어요.

움베르토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보면 주인공이 배운 지식은 기억하지만, 자기 과거는 기억 못하는 병에 걸리잖아요. 나는 그런 적이 많아요. 대학 친구가 말하는 것 중에서 내가 기억 못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에 관한 관심이 거의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니까 언젠가 다시 나한테 관심이 차오르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자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나는 지금 나한테 떨어져 있고 이 책은 이런 시점에서 쓰였습니다.

만난 사람들은 시갈문학회(충북 음성군 노인종합복지관 시 창작 교실을 수료한 시문학 동아리)의 한충자 할머니, 달팽이사진골방 운영자 임종진 씨, 진딧물을 연구하는 김효중 교수 등입니다. 송경동 시인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고요. 책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논픽션 다큐멘터리 특징 중 하나는 장애인다큐는 장애인만 다루고, 외국인노동자 다큐는 외국인 노동자만 다룬다는 거에요. 그 안에 일종의 구별짓기가 존재해요. '너랑 나랑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하려면 너와 나를 섞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럼 어떻게 섞느냐, 나는 '여행'과 '기쁨'으로 섞었죠. 모든 사람은 여행자에요.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 소모뚜도, 지도 만드는 송규봉 씨도. 책에서 특별한 사람, 제 7의 인간을 쓴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책에 쓸데없는 것은 없다고 썼듯, 나는 나한테 끌리지 않는 이야기를 간직하지 않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이 분들을 만난 계기는 다양해요. 알던 사람도 있고, 어느 날 작은 단신 기사를 보고 만난 사람도 있고. 그때 어떤 한 문장이 나를 사로잡은 것 같아요. '할머니들이 책을 냈다'는 단신으로 한충자 할머니를 만났어요. 강판권 교수는 '나무를 세었다'는 문장에 만났죠. 만나서는 대화를 많이 했어요.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말에 공감했어요.

인터뷰를 이야기처럼 풀어서 쓴 이유는 독자들이 '내 인생의 이야기'로 공감할 여지가 생길 것 같아서요.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한테 일어난 이야기다' 이렇게. 문학의 힘은 아주 개별적인 이야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방법으로 제가 써본 거에요.

라디오 프로그램 만들면서 인터뷰 했던 것과는 좀 달랐죠. 라디오 취재 때는 우선 녹음을 해야죠. 책 쓰면서 나는 녹음 하지 않고 손으로 받아썼어요. 인터뷰에 이 사람들의 말이 다 살아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시갈문학회 할머니들인데, 책에서 유일하게 라디오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죠. 이 취재가 참 즐거웠어요. 할머니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만나보면 놀랄 거에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 갑자기 뒤를 돌아 한충자 할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눈이 정말 별처럼 빛나더라고요.

책에 실린 시 읽어 봤죠? 할머니가 아니라 소녀가 쓴 것 같지 않아요? 헌데 이 할머니한테도 얼마나 궂은 일이 많았겠어요. 할머니에게 빛과 어둠이 있으면 이 책은 빛 쪽에 방점을 두었죠. 나는 기쁨에 대해 쓰고 싶어요. 이 책이 여행의 기쁨이라면 다음에는 독서의 기쁨, 밤의 기쁨…. 기쁨을 주제로 시리즈를 쓰고 싶어요.

행복에 대해 쓴 책이 많은데, 내가 계속 공격하는 건 행복에 관한 자기계발서에요. 우리사회에는 행복에 관한 몇 가지 명제들이 있어요. 성공해야 한다,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꿈을 가져야한다, 이런 명제를 다 뒤집어 보려고 해요. 심보선 시인과 함께 책 쓰고 있어요.

나는 인터뷰 하고, 심보선 시인은 사회학자로 행복을 분석하는 책 말이죠. 행복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진짜 행복하길 바라서예요. 남한테 행복해 보이는 거 말고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제대로 행복해지기를 원해서 말이죠.

여기까지가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책을 덮고 우리가 읽고 만났던 책과 사람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에게 말했다. 는 '00가 좋다'라고 말하기보다 '00가 싫다'라고 말하는 냉소주의자에 가까운데, 이 냉소는 사실 타인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받기 싫은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알튀세나 벤야민처럼 자살한 천재들의 냉소는 사실 우울한 세계보다 나약한 성정에서 비롯됐을 거란 추측도 덧붙이면서. 그러니 이 책에서 만났던 긍정적인 사람들은 머리만 꽉 찬 냉소주의자보다 더 충만한 사람,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눈을 밝히며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난 참 잘 들어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은 사람은 없죠"라는 듯이. 이것은 두 번 다시 없을 단 한 번의 기회라는 듯이. 그녀의 책 속 한 장면처럼.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