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두산을 만들겠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취임 일성이다. 형 박용현 전 두산그룹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박용만 회장은 이날 '글로벌 200대 기업'을 목표로 두산그룹을 비약시키겠다는 포부를 천명했다.

준비된 경영인

박용만 회장은 1955년 2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박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미국유학생활 동안 용돈이 넉넉지 않아 자취 생활을 하면서 직접 음식도 해먹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충당했다는 후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박 회장은 사회생활을 1977년 외환은행에서 시작했다. "남의 눈칫밥을 먹어봐야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는 두산가 고유의 경영철학이 내재된 선택이었다. 1883년 두산건설에 사원으로 입사한 박 회장은 두산음료ㆍ두산식품ㆍ동양맥주ㆍ두산동아 등에서 다양한 실무경험을 쌓는다. 박 회장은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임명되며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되고 이후 (주)두산 사장 및 부회장, 두산그룹 부회장,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주)두산 회장을 역임해왔다.

2008년 9월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부인인 명계춘 여사의 빈소에서 두산가의 6형제가 도열해 조문객을 맞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박용욱.
실적으로 존재가치 입증

'M&A의 귀재', 'Mr. M&A', '구조조정 전문가'…

박용만 회장에게 붙은 별명들이다. 박 회장은 1996년 창업 100주년을 맞아 전면적인 사업구조 개편에 들어간 두산그룹을 진두지휘하며 17건의 M&A를 비롯한 그룹의 체질개선을 주도한 바 있다.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두산그룹은 OB맥주 등 주류와 식품사업에 주력하는 소비재 기업이었다. 그러나 2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산그룹은 중공업 중심의 ISB(Infrastructure Support Business: 인프라 지원사업) 기업으로 180도 변신했다.

1996년 이후 두산그룹은 OB맥주를 포함한 주력 소비재 사업을 내다 팔고 사옥 등 자산을 매각,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 이어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6년 영국 미스이밥콕(현 두산밥콕), 2007년 미국 밥캣(현 DII), 2009년 체코 스코다 파워 등 1998년부터 총 17건에 달하는 M&A를 진행했다.

박용만(가운데) 두산 회장이 지난해 3월 건설장비박람회(Con Expo)가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대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진 후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박 회장은‘대학생 전시참관단’ 14명에게“작은 성과라도 쌓이면 행복도 쌓여가는 것”이라며“결코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소비재 기업에서 ISB 기업으로 탈바꿈하면서 수익규모도 급증했다. 1998년 당시 3조4,000억원대였던 매출은 지난해 26조2,000억원을 기록하며 8배 가까이 성장했다.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해외매출도 지난해에는 40%까지 육박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M&A와 해외사업 개척을 통해 두산그룹이 전세계 30개국에 3만9,000여명이 일하는 10대그룹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박 회장이었다. 형님들이 수장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박 회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두산그룹을 정상화시키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일각에서는 형인 박용현 전 회장의 임기가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박용만 회장의 경영승계를 그룹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그간 박용만 회장이 그룹의 굵직한 업무를 직접 챙기면서 전문경영인처럼 실무를 책임져왔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있다. 박용현 회장이 '형제의 난'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그룹의 수장자리에 올랐었다면 박용만 회장은 오로지 실적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유쾌하고 소탈한 성격

"좀 며칠 정신없어 뜸했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트윗 친구 여러분! "

지난 4일 박용만 회장이 트위터를 통해 남긴 말이다. 그룹의 총수에 오르기 3일 전인 지난달 27일 "오늘은 이게 필요한 아침! 으라차차차차차 화이팅!!!"이라는 내용을 올린 이후 8일 동안 트위터 활동을 중단해왔던 박 회장은 마침내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박 회장은 대기업 CEO로는 드물게 트위터로 자신을 소통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미 13만1,600명의 팔로워가 뒤따르는 트위터 스타다. CEO로서는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에 이어 2위에 올라있다. 박 회장은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CEO의 사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은 물론, 사적인 의견이나 유쾌한 성찰 등을 남겨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활발한 트위터 활동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두산그룹 전체의 이미지까지 함께 높이고 있다.

트위터 이외에도 박 회장의 소탈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다양하다. 박 회장은 소주와 막걸리를 즐기고 젊은 사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저녁 자리를 갖는 편이다. 최근에는 SBS 연예프로그램 '짝'에 출연했지만 파트너를 찾는 데 실패했던 자사 직원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평소 의전 없이 경영활동을 해 많은 에피소드도 낳고 있다. 지난해 말 박태준 전 총리의 빈소에 수행비서 없이 홀로 나타나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평소 유머를 즐기는 박 회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지난해 만우절 때 있었던 문자사건이다. 박 회장은 당일 아침 7시 그룹 임원에게 뜬금없이 "왜 안와? 우리 먼저 식사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후 당황한 임원이 "오늘 조찬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죄송하다"고 답장을 보내자 "만우절특별조찬"이라고 위트를 날려 상대를 진땀빼게 했다. 조카에게도 "내가 빠리에 나가 몇 달 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가 걱정하는 조카에게 "만우절특별파견"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이 미래다"

박용만 회장을 가장 잘 설명하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인재경영'이다. 박 회장은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를 직접 썼을 정도로 인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박 회장의 인재사랑은 지난 2일 열린 그룹 회장 취임식 때도 드러났다. 이날 박 회장은 "지금 두산에 필요한 것은 사고와 가치의 준거가 되는 강력한 기업문화"라며 "기업문화를 발현하고 뿌리내리는 것은 사람이므로 '사람이 미래'라는 전략은 더욱 역동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취임사를 남겼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커가고 또 키워지고 있다는 자긍심을 느끼면서 성과에 기여하는 따뜻한 성과주의를 그룹의 바탕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박 회장은 '사람의 성장을 통해 사업을 성장시키고 사업의 성장이 다시 사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의미하는 두산의 핵심전략 2G(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 전략을 수립해 이를 실천하고 있다. 매년 국내 대학에서 열리는 기업설명회에 직접 참가, 회사의 비전 등을 소개하고 해외에서 열리는 MBA 졸업생 면접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미 두산그룹의 식구가 된 인재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다. 일례로 박 회장은 지난해 초 일본 지진 당시 현지의 15명 직원에게 "여러분과 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저의 마음이자, 책무"라며 "여러분과 가족이 대피하시기로 하면 그에 따른 비용은 전액 회사에서 지원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 서신을 보내 직원들을 안심시켰다는 후문이다.

박용만號 부상할까?

본격적인 박용만호가 출범했지만 재계 관계자들은 "단기적으로 볼 때 두산그룹의 사업구조 자체가 급격히 변하는 부분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박용만 회장이 이미 이전부터 그룹 실무 전반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온 까닭이다.

그러나 현재진행중인 그룹의 체질개선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두산그룹은 수입차 사업에서 손을 떼고 외식 사업을 정리하는 등 남아있던 10%가량의 소비재 부문을 점차 털어내고 있다. 소비재 기업에서 ISB 기업으로 탈바꿈했던 두산그룹의 변신과정을 주도했던 박 회장이 그룹의 방향타를 잡은 이상 남은 그룹 구조조정 작업도 한층 빨리 정리될 전망이다.

또한 박 회장의 전문분야인 두산그룹의 해외진출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용현 전 회장이 경영체제 안정화에 중점을 둬왔다면 박용만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영토 확장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용현 회장도 총수직을 내려놓으며 "지주회사 전환으로 경영체제가 안정된 두산그룹 회장을 이제는 본격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최적임자가 맡아야 할 때"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두산그룹의 '실질적인 회장'에서 '진짜 회장'이 된 박용만 회장이 그룹 구조조정 및 해외시장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며 자신의 말처럼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두산'을 만들 수 있을지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형제 경영 마무리 후 '4세 구도'에 관심
●두산의 앞날 어떻게 될까

박용만 회장이 두산그룹의 지휘봉을 마지막으로 잡으며 두산가 3세의 형제경영은 완성됐다.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시작으로 차남 고 박용오 전 회장, 삼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사남 박용현 전 회장을 거쳐 마침내 박용만 회장까지 왔다. 아예 독자사업을 하고 있는 막내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을 제외한다면 형제 모두가 사이좋게 그룹 총수직을 나눠 가진 셈이다.

두산가는 사실 2005년 '형제의 난'을 겪기 전까지 재계에서 가장 좋은 형제애를 자랑했다. 부친인 박두병 초대회장이 누누이 강조했던 '인화'를 바탕으로 한 교육 덕분이었다. 박 초대회장의 철저한 교육으로 '가문 경영'을 100년 넘게 이어 온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을 모델로 오너일가가 공동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두산가의 형제경영은 그럭저럭 무사히 잘 이뤄져 왔다.

물론 아픔은 있었다. 2남으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총수직을 맡았던 고 박용오 전 회장이 삼남인 박용성 회장이 차기 총수로 추대되자 이에 반발, '형제의 난'을 일으키며 결국 두산가에서 제명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당시 검찰수사까지 받았던 두산가는 3년간 비상경영체제를 구축하고 강태순 부회장이 그룹 총수를 맡아오다가 2009년 위기를 매듭짓고 지주회사인 (주)두산을 출범, 4남인 박용현 전 회장이 다시 총수를 맡으며 형제경영을 부활시켰다. 결국 오남 박용만 회장까지 지휘봉이 무사히 넘어오며 3세간 형제경영은 마무리됐다.

문제는 4세로 넘어가면서 어떻게 될 것인지 여부다. 형제경영에서 사촌경영으로 넘어가는 까닭에 현 체제가 유지될지에 대해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4세 중 후계구도상 선두에 위치한 것은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이다. 박정원 회장은 4세 중 유일하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번에 (주)두산의 사내이사로 재선임됐다. 지주회사인 (주)두산의 지분율도 두산가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계열분리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터라 사촌경영이 무사히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박용만 회장의 임기도 세간의 관심거리다. 이번에 그룹 총수에 선임된 박용만 회장에 대해 일각에서는 "박정원 회장이 준비될 때까지 잠시 맡아두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현재 실적, 재무건전성이 추락한 두산건설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박용만 회장이 그룹의 지휘봉을 맡아둠으로써 혹시라도 있을 구설을 막기 위함이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그간 형제경영이 이어지면서 두산그룹 총수의 임기가 15년, 8년, 4년, 3년으로 짧아진 터라 박용만 회장의 임기가 얼마나 될지에 대해 관심이 몰리고 있다.

●박용만 회장

출생 1955년 2월 5일

학력 경기고등학교(1974년)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1978년)

보스턴대학교 MBA(1982년)

1977년 한국외환은행

1983년 두산건설 뉴욕지사

1990년 두산음료 이사, 두산식품 부장, 동양맥주 차장

1994년 두산음료 전무, 그룹기획조정실 부실장 전무

1995년 두산동아 부사장,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 부사장

1996년 OB맥주 부사장

1998년 두산 전략기획본부 대표이사

2002년 (주)두산 대표이사 사장

2005년 (주)두산 대표이사 부회장, 두산그룹 부회장

2005년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부회장

2007년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회장

2009년 두산 대표이사 회장

2012년 두산그룹 대표이사 회장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