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25주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993년 신경영 선언 등 위기마다 뛰어난 리더십1위 제품 잇따라 탄생시켜 매출 39배·시총 303배↑미래 먹거리 로드맵도 마련

연합뉴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한때 인구에 회자됐던 이 문구는 1996년 삼성의 그룹이미지 광고에 쓰였던 카피다. 공교롭게도 해당 광고를 게재했던 당시 삼성은 수년째 재계 수위를 차지하고 있던 현대에 밀려 2위에 머물러있었다. 다시 말해 삼성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오히려 "우리도 이제는 만년2위에서 벗어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다짐은 채 몇 년이 되지 않아 실현됐다.

현대가 '왕자의 난' 이후 여러 그룹으로 쪼개진 이후 삼성은 재계1위 자리에 올랐고 이후 한 번도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재계에서는 공고화된 삼성의 독주체제의 뒤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리더십이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구체적인 경영과정에는 별로 개입하지 않지만 그룹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요 사안에는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보이는 이 회장의 결정이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장이 복귀한 2010년 3월 이후 삼성은 최대 전성기를 누리며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했다.

지난 1일은 이 회장이 삼성의 총수에 올라선 지 25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 회장이 그룹을 이끌어온 25년 동안 삼성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매출규모는 39배, 해외 수출규모는 25배나 늘었고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글로벌 9위까지 치솟았다. 이 회장의 삼성이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영화, 운동에도 열심히

이건희(왼쪽에서 두번째) 회장이 2010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해 시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 창업주 내외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느라 무척 바빴고 이 회장은 부친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던 이 회장은 여섯 살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고 이 창업주는 잦은 전학으로 또래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이 회장을 위해 장난감들을 많이 사줬다고 전해진다. 이 회장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논 것에만 그치지 않고 분해ㆍ조립하는 취미를 가졌고 이러한 취미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3년 고 이 창업주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낯선 일본땅에서 외로움을 느낀 이 회장은 수많은 영화를 보며 쓸쓸함을 극복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삼성물산의 영화 및 방송사업, 삼성전자의 음반사업 등을 통합해 삼성영상사업단을 출범했던 것도 영화애호가였던 이 회장의 기호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귀국한 이 회장은 서울대 사대부중을 거쳐 사대부고에 입학했다. 일본에 있을 무렵 역도산을 동경했다던 이 회장은 사대부고 레슬링부에 들어가서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2학년 말 연습 중에 눈썹 부근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이후 가족들의 반대로 레슬링부를 그만둘 때까지 이 회장은 웰터급 선수로 전국규모의 대회에 나가서 수상하는 등 재능을 보였다. 이후에도 이 회장은 럭비부에 들어가 3주간의 합숙훈련을 소화하는 등 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조지워싱턴대 MBA를 졸업한 이 회장은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하며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1969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로 정식 발령을 받은 이 회장은 10여 년 동안 신생 매체의 정상화에 전력을 다했다. 현재 삼성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도 이때쯤이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에 올랐다가 이듬해부터 그룹 부회장을 맡아오던 이 회장은 고 이 창업주가 별세한 1987년 마침내 삼성의 총수자리에 등극했다.

이건희(왼쪽) 회장이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사기를 건네받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혁신으로 고공행진

이건희 회장은 취임 직후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라고 일갈하며 제2창업을 선언했다. 이 회장에게 그룹을 넘기겠다는 고 이 창업주의 유언 이후 10년 넘게 후계수업을 받아오긴 했지만 큰형 이맹희씨를 제치고 그룹의 총수에 오른 까닭에 그에 걸맞는 혁신이 불가피했던 까닭이다.

이 회장의 제2창업 선언 이후 삼성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그룹과 분리됐었던 전자, 반도체, 통신 등을 삼성전자로 통합시킨데 이어 유전공학, 우주항공 분야의 신규사업을 추진하는 결단을 내렸다. 또한 막강한 정보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던 비서실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혁신에 대한 이 회장의 의지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도 불리는 1993년의 '신경영 선언'에서 극에 달했다. 이 회장은 세계 주요 도시를 탐방 중이던 1993년 6월의 어느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안에서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진노한다. 급하게 긴급회의로 삼성의 임원 200여명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이 회장은 위기의식과 변화를 강조한 신경영을 선언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발언도 여기서 나왔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그야말로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휴대폰, 모니터, TV 등 글로벌 1위 제품을 줄줄이 탄생시키며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삼성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것이다.

이건희(오른쪽) 회장이 2010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CES)에서 3D TV를 시연하고 있다.
이 회장 임기 동안 삼성이 이룬 성과를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해보면 놀라울 정도다. 삼성의 매출은 1987년 당시 9조9,000억원에서 올해 384조원(예상치)으로 39배 성장했으며 수출 규모도 63억달러에서 1,567억 달러(예상치)로 25배 늘어났다. 같은 기간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올해 10월 말 기준 303조2,000억원으로 303배나 증가했다.

반도체, 휴대폰으로 훨훨

삼성의 고공행진은 반도체와 휴대폰이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두 분야의 성공은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결단으로 가능했다.

이 회장은 그룹의 총수에 오르기 전인 1974년 고 이병철 창업주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이에 고 이 창업주가 사업성 검토를 지시했지만 당시 경영진은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냐"며 반대했다. 매년 수천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반도체 사업은 당시 삼성에게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뚝심으로 선행투자를 결심했고 부도 위기에 처했던 한국반도체 인수를 위해 사재를 털었다. 이어 이 회장은 부친을 설득,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이끌어냈다.

이 회장의 판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열매를 맺었다. 이 회장이 그룹 총수에 취임한 이후 삼성은 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 반도체 업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이 회장은 일본 도시바가 선택한 트렌치 방식 대신 스택 방식을 채택하고 반도체 생산라인의 웨이퍼 크기를 8인치(일본은 6인치)로 결정하는 등 혁신을 거듭하며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은 20년 동안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올해 3분기 기준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의 70%에 육박하는 기여도를 자랑하는 휴대폰 사업의 성장도 이 회장의 결단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삼성은 1994년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면서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다.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시장 진출 1년 만에 글로벌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애니콜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외적인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국내 소비자를 중심으로 통화 불만이 늘어나자 이 회장은 당시 기준으로 500억원 상당의 휴대폰을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 모아놓고 모두 불사르는 화형식을 진행했다. 이날의 화형식을 계기로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삼성 휴대폰 사업의 위기는 또 한 번 있었다. 애플이 2007년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피처폰 수준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며 통신시장을 뒤흔들고 있던 위기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미완성작인 옴니아 시리즈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폰과 비교해 소프트웨어ㆍ하드웨어 모두 손색이 있었던 옴니아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경기침체까지 겹치며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쓰러져가던 삼성의 휴대폰 사업을 되살린 것은 때마침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무선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는 체질 개선으로 초강수를 뒀고 삼성 휴대폰 기술의 총집약체인 갤럭시S를 재빠르게 선보였다. 갤럭시S는 7개월 만에 전 세계적으로 1,000만대 판매고를 올리며 삼성 휴대폰 사업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후 선보인 갤럭시S2, 갤럭시S3까지 연달아 성공하며 삼성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지난달 기준 31.3%로 글로벌 1위에 안착했다.

미래 먹거리 통해 세계 1위로

이건희 회장의 결단을 바탕으로 한 반도체와 휴대폰의 성공으로 삼성이 지금까지 커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이 앞으로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정 사업에 집중된 수익 창출 흐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에 삼성은 2010년 사장단 회의를 개최하고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 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의 5대 신수종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선정했다. 또한 5대 신수종 사업에 2020년까지 총 23조3,000억원을 투자, 50조원 가량의 추가 매출을 기록하겠다는 로드맵을 마련한 상태다.

이 회장도 미래 먹거리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는 올해 있었던 신년사에서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는 신사업, 신제품, 신기술에 달려 있다"며 "기업문화를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 기존의 틀을 모두 깨고 오직 새로운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삼성의 현재를 있게 한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까지 책임지며 그룹을 국내 1위에서 세계 1위로 도약시킬 수 있을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 이건희 회장 말ㆍ말ㆍ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그룹의 위기 때마다 의미심장한 발언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국면마다 터져 나왔던 이 회장의 발언들을 살펴보자.

▦1987년 12월 회장 취임사

"우리는 지금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시련과 도전이 몰려드는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삼성 제2창업의 선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소임을 수행할 것이다. 삼성은 이미 한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을 넘어 국민적 기업이 되었다. 새로 출범하는 삼성의 제2 창업에 찬란한 영광이 돌아오도록 힘차게 전진하자."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2003년 6월 신경영 10주년 기념사

"신경영을 안 했으면 삼성이 2류, 3류로 전락했거나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 신경영의 성과를 어려운 국가 경제위기 극복과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확산시켜 나가자."

▦2010년 3월 경영복귀 발언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2012년 1월 신년사

"삼성의 미래는 신사업, 신제품, 신기술에 달려 있다. 기업문화를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 기존의 틀을 모두 깨고 오직 새로운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실패는 삼성인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기를 당부한다."

▦2012년 1월 CES 참관 이후

"정말 앞으로 몇 년, 몇십 년 사이에 정신을 안 차리고 있으면 금방 뒤지겠다 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 긴장이 된다.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가고, 우리가 앞서가는 것도 몇 개 있지만, 더 앞서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출생 1942년 01월 09일

가족 아버지 이병철, 배우자 홍라희, 아들 이재용, 딸 이부진 이서현

학력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1961)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1965)

미국 조지워싱턴대 MBA(1966)

서울대 경영학 명예박사(2000)

고려대 철학 명예박사(2005)

일본 와세다대 법학 명예박사(2010)

1966 동양방송 입사

1978 삼성물산 부회장

1979 삼성그룹 부회장

1980 중앙일보 이사

1987 삼성그룹 회장

1998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2010 삼성전자 회장 복귀

2012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