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만에 영화 '야관문' 주연 신성일1960년 데뷔후 542번째 작품 상대역에 가수 겸 배우 배슬기 말기암 환자-간병인 파격 사랑 그려윤정희·장미희·정윤희 등 파트너 여배우만 118명에 달해 영화 제작자·국회의원 활동도

"일본에 미후네 도시로, 이탈리아에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미국에 그레고리 펙, 프랑스에 알랭 들롱이 있다면 우리에겐 배우 신성일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이 말은 한국 영화계에서 배우 신성일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신성일은 1960년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영화의 주연을 도맡아 하며 양어깨에 우리나라의 영화산업 전체를 짊어졌었던 톱스타다.

신성일이 돌아왔다. 주연으로 영화에 복귀한 것은 1993년작 '망각 속의 정사' 이후 무려 20년 만이다. 신성일이 542번째 영화로 점찍은 '야관문'은 교장 퇴임 후 말기 암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남자가 간병인으로 찾아온 여인과의 거부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영화다. 신성일의 상대역으로는 가수 겸 배우 가 캐스팅됐다.

신성일은 20년 만의 주연복귀에 대해 "이 나이에 흥미로운 캐릭터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야관문'의 교장선생님 역은 충분히 욕심나는 캐릭터"라며 배역과 영화에 만족감과 애착을 보였다.

똑똑한 아이에서 톱스타로

연합뉴스
신성일의 본명은 강신영이다. 신성일이라는 이름은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으로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의 이름에다 신 감독의 성을 딴 것이다. 이후 신성일은 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신성일은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신성일은 경북도청 공무원 출신으로 대구에서 제일 큰 계(契)를 운영했던 어머니 덕분에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또한 신성일은 대구 수창국민학교 재학 시절 성적표에 붙어있던 과목별 성적이 모두 갑상(甲上, 지금의 수)이었을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기도 했다. 대구 최고 명문이었던 경북중학교를 거쳐 당시 한강 이남에서 서울대학교를 가장 많이 보냈다던 경북고등학교에도 너끈히 합격한 신성일은 건축학도가 되는 꿈을 키워나갔다.

신성일의 첫 번째 꿈이 산산조각 난 것은 그가 고2 무렵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부도나면서부터다. 어머니가 서울로 도망가고 집안은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신성일은 결국 서울대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청계천 판잣집에 살며 호떡장수를 하는 등 고생하던 신성일에게 또 하나의 꿈이 다가왔다.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의 1957년 신인공개모집에서 5,08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신필름이 될성부른 떡잎으로써의 신성일을 발견했지만 금방 나무로 키워주지는 못했다.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빠빠'에서 데뷔하기까지 3년 가까이 영화사 사무실 잡부 역할만 해야 했다. 이후 신성일은 '백사부인'(1960), '상록수'(1961), '연산군'(1961) 등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눈에 확 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성일이 배우로서의 전기를 맞은 것은 신필름의 영화가 아닌 극동필름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였다. 해당 영화에서 처음으로 주연급 역할을 꿰찬 신성일은 이후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의 계보를 잇는 멜로영화의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시대를 열게 된다.

배슬기
전무후무한 대기록 보유

신성일은 이번에 출연하게 된 '야관문'을 제외하고 반세기 동안 총 54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중 506편에서 주연배우로 활동했다. 국내 남자배우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1967년에는 51편의 영화를 찍었다. 겹치기 촬영을 감안하더라도 일주일에 한편씩 찍은 셈이다. 그 해 출연한 '안개', '원점', '밀월', '역마' 등이 한국 영화사의 걸작 대열에 올라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용 면에서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신성일이 파트너로 함께한 여배우만 해도 118명에 이른다. 여기에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으로 구성된 소위 1960년대 트로이카와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트로이카가 모두 포함돼있음은 물론이다. 윤정희와는 무려 99편의 영화에서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다.

신성일은 배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영화 연출 및 제작에도 적극적이었던 신성일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 '그건 너'(1974) 등을 감독했고 1990년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해 '코리안 커넥션'(1990), '물 위를 걷는 여자'(1990), '남자시장'(1990),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안개 속에 2분 더'(1995) 등을 제작했다.

정치인으로서의 명과 암

맨발의 청춘
신성일 인생의 2막은 평탄하지만은 않게 진행됐다. 정치 쪽으로 눈을 돌리며 낙선으로 빚더미에 오르기도 하고 국회의원 임기 이후에는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의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았던 신성일은 영화계가 침잠하던 1970년대 중반부터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성일의 야심 찬 첫 국회의원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2야당인 한국국민당에 입당, 1981년 열린 11대 총선에서 용산ㆍ마포 지역구로 출마한 신성일은 5만1,000표를 얻으며 탈락했다.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예명 대신 본명 강신영으로 나간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낙선 이후 밀려드는 당좌수표를 막을 길 없어 결국 부도를 낸 신성일은 고리대금업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신성일 정치 인생에서의 두 번째 실패는 1996년 찾아왔다. 대구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포섭된 신성일은 15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갑으로 출마, 자민련 김복동 의원과 맞붙었지만 결국 패배했다. 이름을 강신성일로 개명했음에도 맞게 된 뼈아픈 실패였다. 이후 신성일은 한나라당 대구 동구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차기를 준비했다.

신성일은 세 번째 도전에서 결국 금배지를 달게 됐다. 신성일은 2000년 열린 16대 총선에서 김복동 의원의 병환으로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던 대구 동구로 다시 출마, 78%의 지지를 받으며 압승을 거뒀다. 국회에 입성한 신성일은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화려했던 국회의원 시절이 끝난 이후 신성일에게는 급격한 내리막이 찾아왔다. 국회의원 시절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옥외광고물 업자들로부터 1억8,7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것이다. 2년여의 수감생활을 보내던 신성일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뤄진 구명운동에 힘입어 2007년 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별
사면 당시 "교도소에서 정치가 생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앞으로 정치 활동은 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조용하게 살겠다"고 밝힌 신성일은 석방 이후 경상북도 영천 근교에 지은 한옥에서 고즈넉한 생활을 해오고 있다.

인생의 반쪽 엄앵란

아내 엄앵란과의 이야기를 떼어놓고 신성일을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신성일의 성공에는 최고의 여배우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내려와 물심양면 내조한 엄앵란의 공이 절반 이상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영화 상대역으로 처음 만났다. 1962년 '특등신부와 삼등신랑'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듬해 '김약국의 딸들',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 7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고 1964년에는 무려 23편을 함께 했다. 한 방송에서 엄앵란이 "3년 반을 둘이서 주연을 했다"며 "눈 뜨면 내 앞의 젊은 남자라곤 신성일밖에 없었는데 어떡하나"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두 사람이다.

신성일은 1964년 '배신'을 촬영하면서 엄앵란에게 마음을 표시했다. 청평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멀리 사라지는 장면을 찍던 중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 이르러 진짜 키스를 해버린 것이다. 엄앵란은 같은 해 개봉한 '대륙의 밀사' 촬영 중 발생한 폭발사고 때 자신의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당한 엄앵란만을 챙기던 신성일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위기의 여자
바쁜 스케줄의 틈새를 이용해 사랑을 싹 틔우던 두 사람은 1964년 11월 14일 워커힐호텔에서 역사상 가장 떠들썩한 혼례를 치렀다. 엄앵란이 임신소식을 알려오며 더 이상 비밀연애를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4,000여 명의 인파가 몰리며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접수부 책상이 무너져 결국 축의금을 받지 못하는 등 흥미진진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가겠냐"는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결혼 이후에도 이어졌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신성일이 뇌물수수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던 당시 펼쳐졌다. 어느 날 신성일의 면회를 간 엄앵란은 교도관으로부터 장미를 받았다. 그 장미가 신성일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교도소 마당에 핀 마지막 송이를 꺾어다 전달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엄앵란은 펑펑 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두 사람은 별거 중이다. 별거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에 신성일은 "우리 부부는 1995년부터 다른 집에서 살고 있다"며 "엄앵란과 잠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먹는 음식 등 모든 것이 잘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신성일은 "엄앵란 사전에 이혼이라는 게 없다"며 "이제 엄앵란과 나는 그런 형태의 부부다. 비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자유분방하지만 자신에겐 철저

요즘 사람들에게 신성일의 성격에 대해 묻는다면 '자유분방한 바람둥이', '주책바가지' 등 여러 반응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성일이 지난 2011년 선보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고백한 애인 고 김영애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잊을 수가 있을까
신성일은 <청춘은 맨발이다> 출간기념회에서 연극배우,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고 김영애와의 밀애 사실을 털어놨다. 당시 신성일은 "아내(엄앵란)도 모르는 사랑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며 "책 안에 밀봉된 부분에 비키니를 입고 있는 김영애의 사진과 함께 수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성일은 "김영애는 내 일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인지도 모른다"며 "한국의 톱배우라는 신성일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까지 지운 여인이었다"고 털어놨다.

불륜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만큼 자유분방해 보이는 신성일이지만 그와 별개로 자기관리에는 무척 철저한 편이다. 아침 4시 30분에 기상해 신문을 읽고 운동하는 것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지독한 노력가인 것이다. 또한 누가 볼세라 걸을 때도 항상 반듯하게 걷고 집안에서도 절대 내의 차림으로 있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엄앵란 또한 "(신성일은) 비디오 빌리러 나갈 때도 옷을 챙겨입고 나가며 동네 아줌마들에게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다니라고 야단을 치는 사람"이라고 고개를 저을 정도다.

신성일은 화려한 스타성과 자유분방한 성격 이면에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감춰진 인물이다. 오랜 휴식을 뒤로 하고 20년 만에 영화판으로 돌아온 신성일이 향후 어떤 활약상을 펼칠지 기대되는 이유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