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일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여는 이문세MC로 데뷔해 가수로 승승장구 노래 대부분 '국민가요' 반열에 후배 뮤지션들에겐 '교과서'"30년 음악적 역량과 공연 노하우 모두 보여주겠다"

이문세의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가 눈앞에 다가왔다. 6월1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5만명 규모로 열리는 콘서트에서 이문세는 "지난 30년 간의 음악적 역량과 공연 노하우를 아낌없이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번 공연의 타이틀은 '대한민국 이문세'다. "공연으로 대한민국 관객들의 지난 세월을 돌려주고 싶다"는 취지에서다. 언뜻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요사에서 결코 누락될 수 없는 그의 족적 때문이다.

실제 이문세의 노래는 한 곡, 한 곡이 국민가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년 동안 팬들의 꾸준한 사랑받아 온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후배 뮤지션들에겐 교과서 같은 존재다. 그야말로 한국 가요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셈이다. 그런 이문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봤다.

MC로 데뷔해 가수로 승승장구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문세는 1978년 CBS 방송국의 '세븐틴'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세븐틴'이란 프로그램에 가수들이 출연해 노래하는 코너에서 펑크를 낸 팀의 수습을 위해 떠밀리듯 노래한 게 시작이었다.

이문세는 이후 '세븐틴'에 주 1회씩 6개월을 고정 출연한 데 이어 고정 DJ로도 활동하면서 방송을 익혔고, 타고난 입담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가운데 1983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음반사의 제안으로 1집 앨범 '나는 행복한 사람'을 발표하며 가수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집은 히트에 실패했다. 이듬해인 1984년 내놓은 2집 '파랑새' 역시 팬들의 주목을 끄는 데 실패했다. 히트곡은 없었지만 '영11'이나 '젊음의 행진' 등 방송에 출연해 모창이나 팝송을 잘 불러 존재감을 빛냈다.

이문세가 급부상한 건 1985년 작곡가 이영훈을 만나 3집 앨범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발표하면서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문세는 그해 방송 순위 1위에까지 오르며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3집의 빅히트를 계기로 그는 톱 DJ이자 특급가수로 떠올랐다. 당시 "조용필이 일본 활동으로 국내에 부재한 사이 이문세가 최고가수 자리를 꿰찼다"는 언론보도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당대의 가왕 조용필과 겨룰 정도의 대중적 위상을 빠르게 확보했던 것이다.

이후의 앨범도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 했다. 특히 1987년 발표한 4집 앨범 '사랑이 지나가면'은 가요계의 전설을 새로 썼다. 수록곡 전곡이 히트하며 285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이다. 당시 사상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뒤엎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문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당시 20~30대 여성들은 죄다 이문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이때 이문세의 LP판은 다른 음반에 비해 200~300원이나 비쌌는데도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3집과 4집의 성공에 이미 묻혀진 1집과 2집도 덩달아 히트했다. 외면당한 음악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나는 행복한 사람'은 30년이 흐른 지금 컬러링 차트에 순위를 올리면서 세월을 견디는 음악이 됐다.

이문세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기존의 스타일과 다른 참신한 음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한국적이며 통속적인 멜로디와 창법이 가미된 '뽕끼발라드'가 대세였다. 노랫말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선율도 지극히 전통적인 패턴이었다.

반면 이문세는 팝발라드를 불렀다. 음악은 세련되고 서정적이며, 클래식했다. 가사는 통속적이지만 저급하지 않았다. 이런 이문세의 음악에 여고생, 여대생, 직장여성이 대규모로 매혹됐다. 나중에는 남성들도 반응했고, 팬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이돌과 댄스의 힘이 강세를 띠는 등 가요계 판도변화로 이문세의 음악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2000년대 '80붐'이 불면서 그 시대의 핵심인 이문세 열풍이 다시 한 번 가요계를 강타했다.

실제로 조성모, 이수영, 신화, 리즈, 서영은, 김범수 등 수많은 후배가수들의 앞다퉈 이문세 곡을 리메이크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문세 제네레이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세대가 아닌 아이돌 그룹 빅뱅도 '붉은 노을'을 불러 2009년과 2010년을 휩쓸었다.

팬들과의 소통에도 힘 쏟아

이문세는 공연을 통한 팬들과의 소통에도 많은 힘을 쏟아오고 있다. 1998년 4월에 시작한 이문세 '독창회'는 이후 '동창회', '소창회', '붉은 노을' 등으로 타이틀을 바꿔가며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동원된 관객만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문세가 이처럼 공연에 팬들을 동원할 수 있던 이유는 먼저 자신의 공연을 히트곡으로 빼곡히 채웠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는 히트곡으로 시작해 히트곡으로 마감하는 국내서 몇 안 되는 뮤지션이다. 이문세의 음악 대부분은 이미 국민가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히트곡으로 공연을 오롯이 메운다 해도 공연을 다시 찾아올 관객은 골수팬 외엔 많지 않다. 그러나 이문세의 콘서트는 매번 새롭다. 레퍼토리가 겹치는 적은 있었지만 무대 구성과 스토리텔링은 항상 달랐다.

이를 위해 이문세는 공연 기획과 준비를 철저하고 세심하게 체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냥 자신의 히트곡을 하나씩 풀어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공연의 '연출자'가 돼 뮤지컬을 방불케 하는 연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특히 이문세는 관객의 입장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투어 공연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스태프 회의를 매주 두 차례 이상 수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매번 그의 콘서트 좌석이 만석인 점에 고개가 끄덕여 지는 대목이다.

어떤 모습 보여줄지에 주목

이문세는 6월1일 가수 데뷔 30주년을 맞아 올림픽 주경기장 무대에 오른다. 무려 5만명 규모다. 이문세는 공연에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지난 30년 간의 음악적 역량과 공연 노하우를 이 콘서트에 집약해 콘서트의 진수를 선보이겠다"고 자신했다.

콘서트의 제목은 '대한민국 이문세'다. 이와 관련해 이문세는 "대한민국과 이문세 사이에 붙을 수 있는 수식어가 많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문세. 대한민국에서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부른 이문세"라고 예를 들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뜨거워지고, 좋은 공연이 됐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사회를 본 김제동은 "대한민국이라는 단어에는 수식어가 필요 없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수 이문세도 그런 것 같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두 단어가 만나서 최고의 공연을 예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문세는 이번 공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더 깊은 감동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문세는 "가수 입장에서 이 공연을 얼만큼 감격스럽게 하는지, 관객들과 얼마나 소통하느냐는 제 마음의 자세와 컨디션이 좌우하는 것 같다"며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여 5만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이문세'. 이 공연에서 이문세는 5만 관객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세월을 따라 사람의 가슴을 두드려 온 그의 다음 무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문세, 가수뿐 아니라 MC로도 '국대'



'영11' '이문세쇼' 등 방송3사 종횡무진… 11년 넘게 '별밤지기'로 '밤의 교육부 장관' 별명

이문세는 한국 가요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여기에 MC로 남긴 족적도 그에 못지않다. 이문세가 처음으로 방송에 데뷔한 건 1978년 CBS 라디오 '세븐틴'을 통해서였다. 6개월 간 고정 출연을 하면서 노래실력과 입담을 검증받아 DJ를 맡게 됐다.

그로부터 1년 후 육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이문세는 임백천의 권유로 KBS 어린이 프로그램 '달려라 중계차' MC 오디션을 봤다. 당시 주변에선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당시 주병진 등 쟁쟁한 후보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염려와 달리 이문세는 MC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전체 어린이 프로그램 가운데 1등으로 올려놨다. 이문세는 당시 KBS 최고 인기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차기 MC로 거론될 만큼 꽤 인정받는 진행자가 됐다.

하지만 1983년 경쟁 프로그램이었던 MBC의 '영 11' MC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85년부터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별밤지기'를 11년 넘게 맡으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별밤지기 이문세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후 이문세는 KBS에서 '이문세쇼', SBS '이문세의 라이브' 진행을 맡으면서 방송 3사를 종횡 무진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MC로 자리매김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