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 국가대표 감독 사실상 내정 홍명보뛰어난 판단력·카리스마 겸비 월드컵 4강·올림픽 동메달선수·지도자로 탁월한 기량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리더십

한국 축구가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에서 6번째로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달성했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수 없다. 앞이 불투명해서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축구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브라질 월드컵까지 남은 기간 동안 대변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희망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차기 A대표팀 사령탑으로 사실상 확정했다. 홍 감독은 당초 '아직 맡을 때가 아니다'며 고사했으나 지난달부터 조금씩 심경의 변화를 나타냈고 2주전 구두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축구팬들은 대한축구협회의 결정을 반기는 분위기다. 홍 감독이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사상 첫 4강 신화를 썼고 10년 뒤 런던올림픽에서 감독을 맡아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거두는 등 선수와 지도자로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축구팬들이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세계 축구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 주리란 바람이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다. 그러나 홍 전 감독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홍명보'라는 존재의 중량은 그렇게 무겁다. 그런 홍 전 감독이 걸어온 길을 조명해봤다.

작은 키, 볼 컨트롤로 극복

연합뉴스
홍명보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축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다. 당시 부모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축구보다는 공부를 해 집안을 꾸려 나가길 바란 데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홍 전 감독은 결국 축구를 선택했다.

그러나 축구가 늘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난히 작은 키가 문제였다. 늘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였다. 이런 신체조건 탓에 감독 선생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어린 홍 전 감독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 경쟁이 덜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키가 여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다. 또래들의 체력과 체격의 수준은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커지고 강해졌다.

몸집이 큰 선수들과 충돌이라도 하면 튕겨져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홍 전 감독은 이런 신체적 핸디캡을 '볼 컨트롤'을 통해 보완했다. 상대 선수들이 접근하기 전 재빠른 패스를 통해 신체 충돌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간 홍 전 감독은 기본기를 탄탄히 다졌다. 향후 성장의 주춧돌을 마련한 셈이다. 홍 전 감독의 진가가 드러난 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다. 키가 자라면서 축구 실력도 덩달아 일취월장 했다. 그리고 고교 2학년과 3학년 연속해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해 고려대까지 진학했다.

홍명보전올림픽대표팀 감독은 지난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이라는 쾌거를 선사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홍 전 감독은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미드필더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 홍 전 감독의 축구 인생의 기로가 찾아온 건 대학교 3학년 시절. 당시 남대식 고려대 감독이 주전 수비수가 졸업해 생긴 빈자리를 맡으라고 지시하면서다.

대학교 3학년에 포지션을 바꾸는 것은 사실 대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홍 전 감독도 보직 전환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팀내 사정상 수비수 전환이 불가피했다. 수비로 포지션이 바뀌자 축구 전체를 보는 시각이 더 넓어진 계기가 됐다.

선수ㆍ지도자 양쪽 기량 모두 출중

홍 전 감독은 대학 4학년이던 1990년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보여준 기량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상대 공격의 '맥'을 읽고 차단해내는 판단력과 지능적인 플레이는 물론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수비라인 및 팀 전체를 통솔하는 리더십도 빼어났다.

특히 그라운드 전체를 꿰뚫는 폭넓은 시야와 전방으로 연결하는 날카로운 패스, 노련한 경기운영능력과 적절한 위치선정은 홍 감독에게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라는 호칭을 안겨줬다. 즉, 실상 가장 공격적인 수비수이면서 가장 수비적인 공격수, '리베로'의 전형이었다.

홍 전 감독은 한일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말까지 13년간 모두 135차례의 국가대표팀 간 경기를 치렀다. 한국 축구 역대 최다기록이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주장 완장을 차고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강을 이룩했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브론즈 볼을 수상하기도 했다.

홍 전 감독은 프로선수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던 1992년팀 우승에 기여해 신인으로는 K리그 최초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히며 화려한 출발을 했다. 또 1994~1996년까지 3년 연속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힐 정도로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쳤다.

국내 프로축구 활동 5년 만인 1997년에는 일본프로축구로 진출하기도 했다. 권태로움에 대한 탈출구였다. 처음엔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로 옮겨 활약하다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그 해 J리그 컵 우승에 공헌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진출 초기엔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 진출했던 1997년 일본프로축구엔 한국 선수가 2명 밖에 없었다. 또 국내에서 정상급으로 뛰던 선수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컸다. 조언을 해줄 사람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기에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데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우로 변해갔다. 선진화된 일본축구를 배우고, 나름대로 성숙한 일본사회의 문화적인 영향도 받았다. 일본 축구 특유의 협력플레이는 물론 선수와 지도자 간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배웠다.

이후 홍 감독은 2002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로 잠시 복귀했다가 2003년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의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했다. LA갤럭시로 진출한 것은 축구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배움의 욕구가 컸다.

미국에서 홍 전 감독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부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체험도 했다. 홍 전 감독은 이런 경험에 힘입어 역대 한국인 코치로서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와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을 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홍 전 감독이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건 지난 2004년이다.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 선수로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6년 A대표팀과 올림픽팀 코치를 거쳐 지도자로 변신했다.

지도자로서 역량을 쌓은 홍 전 감독은 2009년부터는 청소년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아 감독으로 본격 데뷔를 했다. 당시 홍 전 감독의 데뷔를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들도 많았다. 그러나 2009년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이룩하며 이런 시선은 불식됐다.

이후에도 홍 전 감독은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수확했다. 홍 전 감독이 무엇보다 강조한 건 바로 '팀 스피리트'였다.

홍 전 감독은 그라운드 내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팀 문화'를 내세웠고, 개성 강한 유럽파들도 동화됐다. 상의를 하의 유니폼 안에 꼭 넣어야 하고, 훈련이라도 그라운드 안에서는 열정을 모두 쏟아야 한다는 점을 인지시키는 데 주력했다.

특히 홍 전 감독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입시켰다. 또 그는 눈높이를 선수들에게 철저히 맞춘다. 홍 전 감독은 "감독은 선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선수 앞이나 뒤, 때론 밑에서 선수를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홍 전 감독, '최적의 카드' 평가

홍 전 감독은 최근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19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술위원회를 열어 새 사령탑 후보를 홍 감독을 포함한 4명으로 압축했다고 밝혔다. 홍 전 감독의 이름만 거론했을 뿐 나머지 후보들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국가대표팀 새 사령탑에 사실상 확정된 셈이다.

협회는 홍 전 감독을 사령탑에 앉히기 위해 지난 3월부터 홍 감독과 꾸준히 접촉하는 등 물밑작업을 벌여왔다. 당초 홍 감독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고사했으나 지난달부터 조금씩 심경의 변화를 나타냈고 최근 구두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 전 감독은 협회가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카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을 치르면서 대표팀은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조광래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1년 12월 경질됐고, 최강희 감독이 1년6개월의 '시한부 사령탑'을 맞았다.

두 감독의 공통된 문제점은 '불협화음'이다. 조 감독 시절 일부 선수들이 젊은 유럽파를 선호하는 기용 방식에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선수단 통솔 능력이 빼어난 최 감독이 바통을 이어 받았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최 감독이 국내파를 선호하자 내부에서 또 다시 균열이 생겼다. 최 감독은 대표팀 분위기를 해치는 선수들을 과감히 배제하거나 채찍질하며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역시 미봉책일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한국팀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절실한 상황. 그 적임자로 협회는 홍 전 감독을 지목한 것이다. 이밖에 1990년부터 2002년까지 4회 연속 월드컵에서 선수로 직접 뛰었고, 코치로서도 참가한 경험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출항을 앞둔 '홍명보호'의 목표는 명확하다. 세계 축구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다. 물론 세계무대의 벽은 높다. 그러나 한국 대표팀의 활약에 축구팬들의 기대가 모이고 있다. 홍 전 감독의 존재는 그렇게 크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