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회장의 외삼촌 주요 결정 조언 등 어려움 있을 때마다 도움탁월한 친화력과 온화한 성품 7년 넘게 대한상의 이끄는 등 정·재계 인맥 넓어

손경식 전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회장이 7년 7개월간 맡아온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재현 CJ 회장의 구속수감 이후 CJ그룹 비상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의사를 밝힌 것이다. 130년 역사를 지닌 대한상의의 역대 회장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신망을 받아온 손 회장이 위기의 CJ호를 맡아 어떻게 이끌지 주목된다.

삼성전자의 산파 역할

손경식 회장의 누나인 손복남 CJ 고문은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부인이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맏며느리이다. 자연히 손 회장은 이맹희 회장의 처남으로 의 외삼촌이 된다.

1939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손경식 회장의 본가는 경남 밀양시 교동이다. 손 회장이 청운국민학교 5학년에 다니던 시절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 부친 고 손영기씨의 고향인 밀양으로 피난을 갔다. 이후 밀양에서 밀성초등학교를 마친 손 회장은 부산 서대신동으로 피난 왔던 경기중학교 천막학교에서 공부했다. 서울 출신인 손 회장의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가 짙게 배어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손 회장은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검정고시 치는 친구들을 따라갔다가 재미삼아 본 시험에서 합격하는 바람에 손 회장은 경기고 '졸업'이 아닌 '수료'를 하게 됐다. 계획되지 않은 합격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게 된 손 회장이지만 수료 직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것으로 미뤄볼 때 수재였음에는 분명해 보인다.

9일 이임식을 가진 손경식 전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의 구속으로 위기에 직면한 CJ그룹을 구할 구원투수로 나섰다. 연합뉴스
1961년 대학을 졸업한 손 회장은 '법조인보다는 기업인의 활동무대가 넓다'고 판단,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누나인 손복남 CJ 고문이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1958년 결혼한 것도 한일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로 한 손 회장의 결단을 도왔다. 당시 삼성이 한일은행의 대주주로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은행에서 3년간 근무하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을 마친 손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부름을 받고 그룹 비서실에 첫발을 내디뎠다. 비서실 근무시절 손 회장에게 떨어진 첫 임무는 삼성의 신규사업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현재 삼성은 물론 국내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삼성전자 설립의 밑그림이 이때 완성됐다.

삼성전자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던 손 회장은 19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부친인 손영기 당시 안국화재 사장이 아들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후 손 회장은 1977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안국화재 사장에 올라, 16년 동안 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이재현의 경영스승이자 후견인

안국화재를 업계 선두로 이끌며 경영능력을 인정받는 등 삼성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손경식 회장 인생에 전기가 찾아온 것은 제일제당(현 CJ)이 삼성에서 계열분리된 1993년이었다. 야심차게 분가를 결정했지만 아직 젊은 나이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던 의 '후견인' 역할이 요구된 것이다.

이재현 회장
이에 손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제일제당의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삼성과의 분리과정에서 제일제당이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해결사로 활약했다. 삼성이라는 초거대 기업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 나온 제일제당이 큰 위기 없이 현재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이 회장 또한 손 회장이 자신의 '경영스승'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그룹의 주요 결정이 있을 때마다 허심탄회하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CJ에서 손 회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국능률협회, 산업기술진흥협회, 식품공업연합회 등을 맡으며 우리나라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온 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기 시작한 것은 2005년 11월부터다.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손 회장은 재계와 정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한 데다 한국 경제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해 해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인맥 넓어

손경식 회장은 대외 직함만 70여 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제발전심의위원장, 환경보전협회장, 한중민간경제협의회장 등 대한상의 회장이 함께 수행하게 되는 직함들 이외에도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이다.

이는 '조용한 카리스마'라는 별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회원들의 각기 다른 이견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조직을 이끌어가는 손 회장의 성격에 기인한다. 실제로 굵직한 기업인 수장이 필요한 단체들의 경우 일단 손 회장의 의사를 먼저 타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지만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것도 손 회장이 별명 그대로의 사람임을 보여준다.

손 회장은 '주변에 적이 없는 사람'으로 통하기도 한다. 탁월한 친화력과 온화한 성품 덕분에 재계는 물론, 정ㆍ관계의 인맥도 넓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손 회장의 탁월한 인맥에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로 이어지는 화려한 학력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손 회장은 '정도경영'으로도 유명하다. 그룹의 주요 결정은 물론 노사문제에서도 손해를 무릅쓰고 정도를 고집하는 까닭에 주변에서 오히려 놀랄 정도다. 골프에서 멀리건을 받느니 차라리 벌타를 택한다는 주변의 얘기도 손 회장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난자리 넓은 만큼 든자리도?

옛말에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했다. 손경식 회장이 회장직을 반납하고 난 대한상의의 현재 상황을 보면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임식을 가진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손 회장의 난자리가 넓게 느껴지고 있는 까닭이다.

손 회장은 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상의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이임식을 갖고 7년 7개월간의 대한상의 회장직을 마무리했다. 이임식에서 손 회장은 "재임기간은 고뇌와 긴장이 연속되는 날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보람과 긍지의 시간이기도 했다"고 평가한 뒤 "부단한 노력을 통해 상공회의소가 규모 면에서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단체로 우뚝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소망을 밝혔다.

대한상의는 손 회장의 빈자리를 어느 때보다 크게 느끼고 있는듯하다. 차기 회장이 선임될까지 이동근 상근부회장이 당분간 대한상의를 이끌 전망이다. 16명의 부회장들을 중심으로 의사를 타진하고 있지만 경제민주화 입법으로 정부와 재계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대한상의 회장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난자리가 누구보다 넓게 느껴지는 손 회장의 든자리는 어떨까? 손 회장의 든자리는 CJ의 그룹경영위원회가 될 전망이다. 의 구속수감 결정 다음날 사장단 회의를 열고 안정적 그룹 경영을 지속하고 계열사별 책임경영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영진 5인으로 구성된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밝혔다. 손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이미경 CJ 부회장, 이채욱 CJ대한통운 대표이사, 이관훈 (주)CJ 대표이사, 김철하 CJ제일제당 대표이사 등이 뒷받침하는 형태다.

손 회장을 필두로 한 그룹경영위원회는 CJ의 경영안정과 중장기 발전전략, 그룹 경영의 신뢰성향상 방안, 그룹의 사회기여도 제고 방안 등 주요 현안을 심의ㆍ결정한다. 손 회장이 이 회장 대신 그룹을 대표하고 각 사업부문별 전문경영인의 역할이 강해지면서 중대 경영사안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신속성 있게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사실상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SK의 '수펙스(SUPEX) 추구협의회'보다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한상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신망을 받아온 까닭에 누구보다 넓은 '난자리'를 느끼게 하는 손 회장이 '든자리' CJ호의 새 선장을 맡아 총수부재로 인한 경영공백을 확실하게 메울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