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하루 최다·역대 최단 100만 등 개봉 일주일 만에 400만 관객 돌파 국내 영화 흥행기록 잇따라 갈아치워167개국 선판매로 글로벌시장 공략하며 세계적 거장으로의 도약 기대감

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인기다. 8년 전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만화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가 한국을 넘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한국의 대표 감독 중 하나로 거론됐던 봉 감독이 이번 영화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일주일 만에 400만 돌파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개봉 일주일 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음습하고 내용도 무거워 대중성이 떨어질 것이란 세간의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설국열차'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폭발적이다.

실제로 설국열차는 평일 하루 최다 관객(62만명), 역대 최단 기간 100만 관객 돌파(2일), 한국 영화 최단 기간 400만 관객 돌파(7일) 등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며 질주하고 있다. 한국 영화 역사상 9번째로 1,000만 관객을 넘는 것은 물론 역대 최다 관객 기록도 갈아엎을 기세다.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윤태호 작가의 <설국열차> 프리퀄(원작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 웹만화도 연재 4일 만에 조회수 300만을 넘어선 상태다.

'설국열차'를 향한 봉 감독의 애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성공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설국열차'의 촬영일수는 2개월 28일에 불과하다. 72회로 진행된 '설국열차'의 촬영 스케줄은 전작들에 비해서도 적은 편이다. 그러나 봉 감독이 실제로 '설국열차'를 가슴 속에 품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봉준호 감독(왼쪽부터), 배우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트, 고아성, 송강호가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영화 '설국열차'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설국열차'는 프랑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괴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전인 2005년, 홍대의 책방에서 접한 만화책 '설국열차'에 매료된 봉 감독은 그때부터 이번 영화를 구상해왔다고 한다. 결국 지난 1일 '설국열차'가 개봉하기까지 약 8년 동안의 긴 잉태과정 끝에 결실을 보게 된 셈이다.

만화, TV에 영향받아

1969년 대구에서 출생한 봉준호 감독은 중학교 시절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품었다고 한다. 디자인 전공자였던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수많은 외국 디자인 서적들을 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던 봉 감독은 자연스레 만화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다. 그 이후로 봉 감독은 항상 만화를 그렸고 그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감독을 하면서 콘티를 직접 그리게 된 것에도 그때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봉 감독에게 만화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친 것은 TV였다. AFKN에서 방영되던 할리우드 영화들은 봉 감독에게 또래들보다 성숙한 경험을 전해줬고 샘 페킨파와 히치콕 등 거장을 접하게 해줬다. 그러면서 영화잡지를 통해 정보를 얻었지만 구하기는 쉽지 않았던 영화들을 열망하게 된 봉 감독은 중고 비디오 시장을 돌며 희귀작을 접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영화감독의 꿈을 품어왔지만 정작 봉 감독이 선택한 것은 사회학과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펴낸 한 책에서 봉 감독은 "1980년대부터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감독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봤다"며 "영화를 전공하는 것보다, 인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영화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설국열차’
봉 감독이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1988년의 대한민국의 '6월 항쟁'의 여파와 올림픽 등으로 뜨거운 시절이었다. 영화 동아리와 학생운동을 오가던 봉 감독은 과거에는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봉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에 고스란히 투영되게 된다.

5편째 세계적 감독 도약

봉준호 감독의 영화계 입문은 연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 감독은 당시 친구들과 만든 교외 영화 동아리 '노란문'에서 16㎜ 첫 단편 '백색인' 각본과 연출을 담당했다. 화이트칼라 주인공이 달동네를 헤매다 우연히 '잘린 손가락'을 줍게 되면서 전개되는 '백색인'은 계급 문제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었지만 당시 단편영화의 정치적 스타일과는 거리를 둔 까닭에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한 봉 감독은 단편 '프레임 속의 기억'과 '지리멸렬'을 연출했다. 이 중 언론인과 대학교수와 법조인이라는 한국 사회의 지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허위를 들추는 내용의 '지리멸렬'은 영화인들에게 봉준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고 전해진다.

이즈음 '지리멸렬'의 시나리오를 우연히 접한 박찬욱, 이준익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를 받고 도전했지만 결국 완성하지는 못했던 봉 감독은 1995년 박종원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 연출부로 들어갔고 '모텔 선인장'의 조감독도 맡았다. '모텔 선인장'에서 처음으로 장편영화 현장을 경험한 봉 감독은 1998년 한국형 잠수함 영화 '유령'의 시나리오를 장준환 감독과 공동 작업하고 이듬해 '플란다스의 개'로 정식 데뷔했다.

봉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로 신입답지 않은 탄탄하고 치밀한 연출력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003년 개봉한 '살인의 추억'으로 봉 감독 자신 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높은 평가는 물론, 작품성과 상업성 모두를 인정받았다.

2006년 선보인 '괴물'로 봉 감독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창 밖으로 한강 다리에서 괴생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이와 관련한 영화를 만들겠다던 봉 감독의 꿈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이다. 최단기 1,0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괴물'은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봉 감독의 세계 진출을 뒷받침해줬다.

2008년 미셸 공드리, 레오 카락스 감독과 함께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 멜로적 감수성까지 인정받은 봉 감독은 2009년 네 번째 장편 '마더'를 들고 나왔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그린 '마더'는 김혜자의 파격 연기 변신으로 더욱 화제를 모았다.

2000년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를 선보인 이후 '살인의 추억'(2003년), '괴물'(2006년), '마더'(2009년) 등 3년 간격으로 꾸준히 작품을 낸 봉 감독은 이번 '설국열차'를 통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봉준호와 설국열차 순항할까?

개봉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질주고 있는 '설국열차'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4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이상 큰 흥행을 거두지 않고서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계에서는 '설국열차'가 대규모 제작비를 투입하고서도 국내외를 동시에 공략,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흥행코드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태풍'(곽경택 감독, 제작비 200억원, 410만명 동원), '마이웨이'(강제규 감독, 제작비 280억원, 210만명 동원) 등 당시 한국 영화 최대 제작비를 들인 영화들은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최근 개봉한 김용화 감독의 '미스터 고'도 225억원이 투입됐지만 중국에서 잭팟이 터지지 않으면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적은 제작비의 '7번방의 선물'(이환경 감독, 제작비 35억원, 1,280만명 동원), '은밀하게 위대하게'(장철수 감독, 제작비 70억원, 700만명 동원) 등은 크게 성공하며 '많은 제작비가 필요치 않다'는 영화판의 속설을 증명했다. 430억원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 기록을 갱신한 '설국열차'의 흥행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다행히 '설국열차'는 개봉 전에 전세계 167개국에 선판매로 이미 제작비의 절반인 2,000만달러를 거둬들이며 이후 전망을 밝게 했다. 국내 관객 수입만으로는 제작비를 뽑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영화를 만든 봉 감독의 선택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렸던 기존 한국영화들과 달리 크리스 에번스,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턴 등 할리우드 정상급 배우들이 출연한 데다 배급 또한 미국의 메이저 배급사 와인스타인 컴퍼니가 맡고 있어 흥행 요소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상태다.

4편의 장편 영화로 한국의 대표감독으로 떠오른 봉 감독이 '설국열차'를 타고 흥행성과 작품성 양면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