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전국정원장과 김용판전서울지방경찰청장이 16일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 여야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 '5공 청문회' 손도 안 들고 불성실 선서… 모르쇠·변명 일관
국정원 사건 이례적 버티기 위증죄 드러나도 처벌 못해
66년 사카린 밀수사건 특조위 "검찰 고발" 강경 선서 거부하던 관련자 '두 손'
최규하 출석 수차례 거부 96년 법정서도 침묵 일관 12·12 진실 끝내 묻혀

"증인으로서 증언을 함에 있어서는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에 대한 법률 제7조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진술이나 서면답변에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하는 증인들이라면 반드시 거치는 증인선서의 내용이다. 1948년 제헌 헌법으로 국정조사 및 국정감사 제도가 도입된 이후 증인들이 선서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통과의례이기에 선택의 문제로조차 취급되지 않았다. 아예 출석하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청문회장에 왔다는 것은 증언하겠다는 의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6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증인선서를 거부하며 그동안의 '상식'은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증인선서 거부가 법적으로 어긋난 행위는 아니었기에 이를 건너뛰고도 청문회는 진행됐다. 그러나 선서를 거부한 증인들의 답변에서는 진정성이 결여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김 전 청장, 원 전 원장의 증인선서 거부가 극히 이례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상 초유의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동안 국회 국정조사 및 국정감사 등에서 증인선서를 거부한 경우는 여러 차례 있어왔다. 그러나 과거 사례들을 감안하더라도 김 전 청장과 원 전 원장의 증인선서 거부는 더욱 후안무치한 점이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2004년 대검에서 열린 대선자금 청문회에서 송광수(왼쪽) 당시 검찰총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례적인 증인선서 거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댓글 의혹 사건 관련 국정조사 청문회'(이하 청문회)에 16일 출석한 김용판 전 청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두 사람 모두 관련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증인선서 거부의 이유로 들었다.

이날 오전 청문회에 출석한 김 전 청장은 증인선서를 거부하고 대신 소명서를 낭독했다. 김 청장은 소명서를 통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진행하는 특위 국정조사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정조사와 동시에 형사재판이 진행 중인데 증인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는 과정에서 진의가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지면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해명했다.

이어 김 전 청장은 "이에 증인은 부득이하게 증언감정법 제3조 1항 및 형사소송법에 따라 선서를 거부하며 원칙적으로 증언과 서류 제출을 하지 않겠다"며 "증언은 거부하지만 질의성격에 따라 성실히 답변하겠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오후에 출석한 원 전 원장도 비슷한 내용으로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원 전 원장은 "증언감정법에 따라 증인 선서를 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면서도 "형사재판과 관계없이 진실은 그대로 말하겠다"고 언급했다.

989년‘5공청문회’당시 증언에 나섰던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특기할만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증인선서는 거부했지만 증언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질문에만 선별적으로 증언하며 국회와 TV로 청문회를 시청하는 국민들을 우롱했다고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거짓말 드러났어도 처벌 못해

문제는 증인선서를 거부한 원세훈 전 원장과 김용판 전 청장의 발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지라도 위증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에 관한 법률(이하 증언감정법) 제3조와 형사소송법 148조는 국회에 출석한 증인이 재판 등의 이유를 소명하는 경우 선서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증언선서를 거부할 경우에는 두 사람의 발언의 진위를 근거로 처벌이 어렵다.

증언감정법 제14조에 따르면 증인선서를 한 뒤 위증사실이 밝혀지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있다. 그러나 선서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증인선서를 거부한 증인의 거짓말은 위증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위증죄는 선서를 위반한 것에 대한 사법방해죄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이다.

1989년법사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온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
증언감정법 제12조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선서를 거부한 증인에 대해서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김 전 청장, 원 전 원장의 경우 본인들이 받고 있는 재판을 근거로 선서를 거부했기 때문에 처벌이 쉽지 않다.

'면죄부'가 돼버린 증인선서 거부의 폐해는 곧바로 나타났다.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의 발언이 위증이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드러났지만 그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향후 국회 청문회에도 좋지 않을 선례로 남을 전망이다.

원 전 원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당시 국정원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찬성, 남북정상회담 찬성 등 정권 홍보 댓글 작업을 했느냐"는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에 질문에 대해 "그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당시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006년 국정원 국내 책임자가 찾아와 홍보 댓글 작업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며 "원 전 원장의 진술은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전 청장은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 대한 압력행사 의혹에 대해 부인하며 "직원들이 밤까지 새며 고생한 권 과장을 격려해주라고 해서 전화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일 열린 2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권 전 과장은 "김용판 청장이 직접 전화를 했고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며 "(김 전 청장의 진술은) 거짓말이다"라고 반박했다.

항복 선언한 이창희, 이일섭

증인선서 거부와 그로 인한 위증죄 처벌이 법적으로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만약 국정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여야 의원들의 중지를 모았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966년 열린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사건'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대처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구성된 특조위는 1966년 10월 19일 해당 사건으로 서울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고 이창희 당시 한국비료 상무와 이일섭 전 한국비료 상무를 증언대에 세웠다. 그러나 이날 증언에 나선 이창희 상무는 "재판을 앞둔 피고로 있기 때문에 증언은 바른 대로 하나 선서는 생략할 수 있으며 선서를 거부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하며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구속 당시만 해도 비교적 순순히 사실을 자백한 이일섭 전 상무 또한 이창희 상무와 함께 증인선서 거부에 나섰다.

당황한 특조위는 두 차례나 정회해가며 대책을 논의했고 보다 못한 김진만 위원장이 두 사람에게 "일단 선서만 하고 인적 사항이나 댄 뒤 법에 따라 부분적으로 증언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지만 두 사람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김용판 전 청장, 원세훈 전 원장과 같은 이유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특조위는 지금과 달랐다. 여야 의원 모두가 입을 모아 "이것은 삼성그룹의 국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분노하며 검찰 고발을 결정, 당장 그날 밤부터 두 사람에 대한 고발장까지 쓰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담당 교도관을 증인으로 불러 이들에게 증인선서 거부를 사주한 배후가 누구인지 추궁하는 등 강경대응으로 나섰다. 예상외의 강한 대처에 밤새 전전긍긍하던 삼성그룹 측은 결국 다음날 오전 "어제는 착각으로 증인선서를 거부했으나 오늘 다시 정식으로 증인선서를 하겠다"고 항복선언을 했다.

김기춘도 검찰총장 시절 전력 있어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최근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며 정권의 2인자로 화려하게 부활한 김기춘 실장도 증인선서를 거부한 적이 있다. 김 실장이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1989년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때의 일이다.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은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안기부(현 국정원)와 검찰 등 공안당국의 ▦고문 여부 ▦변호인 접견제한 ▦피의사실 공표 문제 ▦기소의 형평성 상실 등을 문제 삼기 위해 1989년 9월 23일 열린 국정감사 때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과 함께 증인으로 국회에 출두했다.

이날 김 총장은 "수감기관의 장으로서 증인선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증인선서를 거부해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증인선서 거부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커지자 뒤늦게나마 선서를 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김기춘 실장과 비슷한 이유로 증인선서 거부를 한 사람이 있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다. 송 전 총장은 2004년 2월 11일 열린 대선자금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날 송 전 총장은 "검찰권 행사를 총괄하는 총장으로서 진행 중인 수사에 관련해 청문회 증인으로 선서하고 증언대에 서게 된다면 검찰 수사가 크게 위축되고 수사의 독립과 중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양해해 주신다면 증인선서 없이 최대한 성의있게 보고 및 답변을 드리겠다"고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국정조사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김용판 전 청장, 원세훈 전 원장의 경우와는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전두환, 최규하도 선서 거부

김용판 전 청장, 원세훈 전 원장과 비슷한 사례로는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씨를 꼽을 수 있다. 그 유명한 '5공청문회' 때의 일이다.

'5공청문회'는 1988년 제13대 국회에서 전씨를 비롯한 제5공화국 정부의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개설된 '5공비리특별위원회'가 주도해서 연 청문회다. 일해재단 비리,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언론기관 통폐합 문제 등 광범위한 사안을 다루기 위해 열린 헌정 사상 최초의 국회 청문회로 당시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 덕분에 열릴 수 있었다.

'5공청문회'의 최대 관심사는 전씨의 증인 출석 여부였다. 당시 백담사에서 칩거 중이었던 전씨는 증인 출석을 거부했으나 여야 의원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결국 1989년 12월 31일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전씨는 증인선서 차례가 되자 손도 들지 않은 채 증인선서문을 읽어 빈축을 샀다.

전씨는 "5공비리 및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의 연석회의에서 증언함에 있어서 진실되게 할 것이며 거짓이 있을 때는 법에 따른 처분을 감수하겠다"고 선서했지만 1시간 35분에 걸친 증언 과정에서는 일해재단 모금비리, 해외재산도피 여부, 동생인 전경환씨의 이권개입비리 등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일해재단 및 새세대육영회 비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재단 설립의 당위성과 선의만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의원 여러분들이 이 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소가 되도록 독려해달라"고 말해 야당 의원들로부터 "우리가 강연 들으러 온 줄 아느냐"는 비난을 들었다. 당시 민주당 초선의원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여당 의원들에게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라고 소리치고 소란을 틈타 청문회에서 퇴장하려는 전씨에게 명패를 집어던져 청문회스타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손을 들지도 않은 데다 증언에서는 거짓말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증인선서는 했던 전씨와 달리 전직 대통령 고 최규하씨는 증인선서조차 거부했다.

최씨는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2.12 군사반란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최고 국정지도자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고인' 또는 '증인' 자격으로 검찰 소환이나 법정 출두를 숱하게 요구받았으나 단 한 차례도 스스로 응하지 않았다. 법원의 계속되던 증인신청 요구에 불응하던 최씨는 1996년 11월 14일 열린 12.12 및 5.18 수사 관련 항소심 11차 결심공판 때 강제구인 절차에 의해 딱 한 번 법정에 서게 됐다.

그러나 최씨는 증언대에 선 뒤에도 인적사항에만 응한 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행위에 대해 후일 소명이나 증언을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이러한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배출될 대통령들의 직무 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익에 손상이 된다"며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변호인 측에서 준비해온 40여 개의 신문사항을 포기한 채 딱 한 가지 질문에만 대답을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굳게 닫힌 최씨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2006년 10월 11일 최씨가 노환으로 별세하기까지 침묵을 지킴으로써 역사의 진실은 끝내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됐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