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LB 맹활약 류현진·추신수

● 류현진
14승 올시즌 신인 중 최다승
평균자책점도 2.97 특급
29차례 선발 24차례 6이닝 이상 책임져

● 추신수
20홈런-20도루-100득점
내셔널리그 톱타자 최초
113년 ML 역사에 10명뿐

국내 프로야구에 몇팀이 있는지는 몰라도 박찬호가 언제 어느 팀을 상대로 몇개의 삼진을 잡았는지는 줄줄이 꿰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덩치 큰 선수들을 상대로 150km의 강속구를 뿌려대던 박찬호의 모습은 위안이자 자신감이었다.

물론 당시와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제2의 박찬호라고 불릴 선수들이 등장했다. LA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약 중인 류현진과 신시내티 레즈에서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활약 중인 추신수가 그 주인공이다.

먼저 올해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류현진은 최근 시즌 14승을 따냈다. 올해 신인들 중에서는 최다승이고 내셔널리그 전체를 통해서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셸비 밀러(15승 9패)에 이어 2위에 올라있다.

추신수의 성적도 만만찮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올해 신시내티 레즈로 둥지를 옮긴 추신수는 최근 19, 20호 도루에 성공하며 20홈런-20도루-100득점의 기록을 완성했다. 내셔널리그 톱타자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당연히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다. <주간한국>에서는 창간 49주년을 맞아 한국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쓰면서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두 선수가 걸어온 길을 집중 조명해봤다.

이 악물고 '괄목상대'

류현진은 데뷔 첫해부터 메이저리그 정상급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류현진과 추신수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류현진에게는 큰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경험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류현진은 2006년 인천 동산고를 졸업했다. 당시에도 메이저리그에서는 류현진에게 작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다저스도 류현진 스카우트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류현진은 고교 2학년 때 받았던 왼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전력에 발목이 잡혔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류현진의 장래성보다 부상 재발 가능성에 좀 더 비중을 둔 것이다.

급기야 인천 연고 구단인 SK도 류현진을 포기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SK는 1차 지명에서 류현진 대신 인천고 대형 포수 이재원을 택했다. 결국 2차 드래프트 시장으로 나온 류현진은 나승현(롯데)에 이어 전체 2순위로 한화의 유니폼을 입었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SK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낀 류현진은 이를 악물었다. 결과도 눈부셨다. 데뷔 첫해 18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3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왕을 석권한 것이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SK의 포기가 류현진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2006년 이후로도 류현진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7년 통산 성적은 190경기 1,269이닝 98승(8완봉승) 5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0이었다. 개인통산 100승을 채우지 못한 게 조금 아쉽지만 입단 후 7년 만에 이룬 성적이라는 점에서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국제대회에서도 류현진은 '대한민국 에이스'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류현진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사상 첫 전승 금메달의 주역이었고 이듬해에 열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는 한국의 준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메이저리그 괴물투수로

다저스가 한국의 젊은 왼손투수에게 아낌없이 투자한 것은 류현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류현진은 시속 150㎞ 이상의 강속구에다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 등 다양한 변화구까지 겸비하고 있다. 거의 같은 모션에서 여러 구종을 자유자재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흔치 않다.

또한 188㎝ 105㎏의 당당한 체구가 말해주듯 '마당쇠 체력'도 류현진의 매력포인트다. 류현진은 2006년 입단 후 올해까지 7년 동안 1,269이닝을 던졌다. 1년에 180이닝 이상 소화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미국으로 건너간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특유의 강행군을 소화하지 못해 결국 되돌아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류현진의 성공요인 중 강철체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다는 점이 쉽게 이해된다.

실제로 류현진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적인 한해를 보내고 있다. 14승 7패, 평균자책점 2.97이라는 성적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급 기록이다. 팀 내 공헌도도 상당하다. 류현진은 시즌 초반 주전들의 줄 부상과 부진에 허덕이던 최악의 팀 분위기에서 꿋꿋이 마운드를 지켰고 29차례 선발 등판에서 무려 24차례나 6이닝 이상을 던졌다. 5이닝도 버티지 못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다. LA 다저스로서는 돌고 돌아 다시 찾은 류현진이 구세주로 여겨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추신수, 고교 때부터 유망주

부산에서 태어난 추신수는 8살 시절 야구에 입문했다. 운동선수인 아버지와 외삼촌의 영향이었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복싱과 수영 선수를 지낸 추소민씨이고, 외삼촌은 전 롯데 자이언츠의 2루수이던 박정태씨다.

추신수는 부산고등학교 시절 좌완 파이어볼러(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고교 야구계에서 유망한 투수였다. 당시 최고 구속은 140km/h 전후. 이는 당시 고교 야구와 좌완 투수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추신수는 2000년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해 활약상을 남겼다. 메이저리그 팀인 시애틀 매리너스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도 이때다. 추신수는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 스카우터로 한국에 와 있었던 이재우 전 OB 감독과 입단 구두 계약을 했다.

추신수는 그해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이대호와 이동현 등과 함께 참가해 우승에 기여했다. 경기가 끝난 후 계약금 135만 달러의 조건으로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1년부터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타자로 뛰었다. 매년 잠재력을 보여 줬지만, 시애틀 구단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던 2006년 시즌 중반에 시애틀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됐다. 당시 추신수는 중견수 백업으로 주로 마운드에 올랐다.

승격 후 백업 요원으로 출장하여 15타수 1안타(타율 .091)의 극도의 타격 부진을 겪었다.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내야수 벤 브루사드(주로 1루수로 활약)를 상대로 트레이드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했다.

추신수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이 무렵부터다. 이적 직후 전 소속 팀 시애틀과의 홈 경기에서 6회 상대 에이스 펠릭스 에르난데스의 직구를 받아쳐 1-0으로 승부를 짓는 결승 솔로 홈런을 만들었다.

또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6회 만루 홈런을 치기도 했다. 클리블랜드 이적 후 성적은 타율 .297, 3홈런, 22타점이다. 향후 소속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타선의 핵'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7년 부침을 겪는다. 시즌 초반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선수들에게 밀려났다. 여기에 팔꿈치 부상까지 겹치면서 마이너 리그에서 장기간 동안 재활을 거듭했다. 결국 추신수는 수술을 받고 시즌을 마감하여 재활에 집중했다.

이후 추신수는 지속적인 출장이 보장된 상황에서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용될수록 기복이 없는 타격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시즌 중반부터는 타격감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활약상을 보여줬다.

2008년 시즌이 끝날 무렵 추신수는 0.309타율에 14홈런 66타점을 기록했다. 한국인 출신 메이저리거로 최초로 3할 타율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부터 추신수는 소속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가장 기대받는 선수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무한 성장

2009년은 추신수가 무한 성장한 해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해 준결승과 결승전에서 각각 홈런을 쳐내면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동년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풀타임 출전했다. 거듭된 경기를 통해 추신수의 실력은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실제, 추신수가 2009시즌 때려 낸 20개의 홈런은 종전에 최희섭이 가지고 있던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한 시즌 최다 홈런(15개)를 넘었다. 여기에 3할과 도루 20개를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에서 '20-20 클럽'에 가입한 유일한 선수가 됐다.

2010년 추신수는 한층 성숙해졌다. 타격감과 주루 센스가 한 층 더 높아졌다. 시즌 초부터 3경기 연속 안타와 3타수 2안타 2타점을 한 경기에 모두 기록하는 등 '불방망'이 타격감을 기록했다.

그해는 추신수에게 특히 뜻깊은 한해로 기억된다. 추신수는 2시즌 연속 3할 및 '20-20 클럽'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가 된 데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해 병역을 해결, 지속적인 메이저 리그 활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FA 자격을 1년 앞둔 지난해 말 추신수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신시내티 레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3개 구단이 참여한 '3각 트레이드'를 통해 중부지구 팀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내셔널리그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신시내티 구단이 추신수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여기에 추신수는 성적으로 화답했다. 지난 24일 19, 20호 도루에 성공하며 20홈런-20도루-100득점의 기록을 완성했다. 내셔널리그 톱타자로서는 최초, 113년의 메이저리그 사상 10명의 선수만 세운 대기록이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