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권 상실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법정관리 들어가더라도 피해 최소화해 달라" 주요 경영진 모아 놓고 당부재계 최초 '사위 후계자' 수십년 경영노하우 전수받아 '찬란한 시절' 재기 가능할까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라도 회사채, 기업어음(CP) 투자자들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끝까지 노력해 달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 지난 주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신청을 결심한 후 주요 경영진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다. 그룹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떨어지게 됐지만 마지막까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현 회장의 나직한 어조는 그가 걸어온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파국 맞이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의 동양그룹이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과중한 차입금과 금융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달 30일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등 3개 계열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동양그룹은 다음날 동양시멘트, 동양네트웍스마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전날 법정관리를 그룹의 모태회사인 동양시멘트와 총수일가가 애착을 갖고 있는 동양네트웍스의 경우 신청한 3개사와 달리 자금상황이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알려진 곳들이라 더욱 충격을 줬다.

현 회장이 사실상의 해체를 각오하고 주요 계열사의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지난달 30일자로 만기가 돌아온 1,070억원대의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비롯한 빚 독촉을 감당할 능력도, 상황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동양그룹의 CP 및 회사채는 1조1,000억 원에 달한다. 당장 이달에 상환해야 하는 돈이 5,000억원 이상인데 최근 주력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에서 디폴트(D)까지 줄줄이 추락한 데다 금융투자업 규정 개정안 시행에 따라 이달 말부터는 그룹 계열사를 통해 부실채권을 정리할 수도 없게 됐다. 이달에 유독 회사채 및 CP 상환이 몰려있는 동양그룹으로선 더이상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법조인→경영인' 제2의 인생

동양그룹의 몰락으로 경영권마저 유지하기 어렵게 된 현재현 회장에게도 찬란했던 시절은 있었다. 재계 최초의 '사위 후계자'로 동양그룹을 물려받기까지 승승장구하던 시절이다.

1949년생인 현 회장은 전형적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알려진 고 현상윤 총장이 현 회장의 할아버지이고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고 현인섭 교수를 부친으로 두고 있다.

형제들도 학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큰형인 현재천 교수는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 둘째형 현재민 교수는 카이스트 해양시스템공학과 교수로 있다. 여동생인 현재희 교수는 세종대학교 음악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막내인 현재란씨는 이화의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현 회장 역시 경기고등학교 및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대학 3학년 때 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등 비상한 머리를 자랑했다.

해군 법무관을 마치고 1975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입문한 현 회장은 고 이양구 동양그룹 회장의 딸인 이혜경 동양매직 고문을 만나 1976년 결혼했다. 고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의 중매로 만나 사랑을 싹 틔웠다는 후문이다.

동양그룹 창업주인 이 회장은 1945년 북에서 홀로 월남한 데다 딸만 둘을 두고 있었다. 결혼 직후 현 회장이 법조인에서 경영인으로 탈바꿈한 것에는 장인인 이 회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19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입사한 현 회장은 이 회장 아래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낮에는 현장을 같이 누비며 실전과도 같은 수업을 받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수십년 동안 쌓아온 이 창업주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혹독한 경영수업을 마치고 1983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동양시멘트 사장을 맡게 된 현 회장은 1988년 동양증권 회장을 거쳐 1989년 마침내 동양그룹 회장에 올랐다. 사위 경영인으로서 그룹 회장에 오른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현 회장이 금융업의 꿈을 발견한 때는 결혼 직후 떠난 유학시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공부하며 금융업의 성장 가능성에 눈을 뜬 현 회장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그룹을 종합금융기업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종합금융기업을 향한 현 회장의 첫 꿈은 1984년 일국증권(동양증권) 인수로 막이 올랐다. 당시만 해도 증권업은 대형사고와 경영부실이 잦아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현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던 임원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며 인수작업을 완료했고 그 노력은 곧 보답받았다. 인수 당시 자본금 20억원에 하나의 지점만을 갖고 있었던 동양증권이 인수 5년 만에 10대 증권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현 회장은 동양투자자문과 동양생명, 동양창업투자 등을 차례로 설립하며 동양그룹에 종합금융기업의 색을 덧씌웠다. 현 회장은 국내에 선물(先物)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도 꼽힌다. 1990년 국내 최초의 선물회사인 동양선물을 설립한 현 회장은 선물협회 창립을 주도, 1993년에는 금융선물협회 초대회장도 역임한 바 있다.

1997년 불어닥친 IMF외환위기는 현 회장의 탁월한 수완과 경영철학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던 시절이다. 은행과 증권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시점에서 공적자금 없이 자력으로 고난을 극복한 것이다. 동양오리온투자신탁은 정부의 지원 없이 경영정상화에 성공했고 5,000억원 상당의 고객 손실을 전액 보전해주기까지 하며 호평을 받았다. 사회공헌차원에서 금융업을 제2의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온 현재현 회장의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가 이후 내리막

고 이양구 회장이 1989년 타계한 이후 동양그룹의 경영권은 가족 간 협의를 통해 맏사위인 현재현 회장이 승계했고 둘째 사위인 담철곤 회장은 동양제과를 맡았다. 사위로 회장에까지 오른 두 회장은 시멘트와 금융,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등 각자의 사업영역에서 독자경영을 해왔다. 서로 맡았던 분야가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은 이후 기업분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담 회장은 동양제과를 비롯해 제과 및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16개 계열사를 갖고 2001년 분가해 나갔고 계열분리 이후 현 회장은 금융분야에 집중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현 회장과 동양그룹은 곧 쇠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에너지ㆍ발전 등 신사업에 뛰어드는 한편 한일합섬을 인수하며 섬유사업을 시작하는 등 확장전략을 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 경제 위축에 따른 자금 경색 상황이 도래하며 과도한 부채와 영업전략 실패라는 부메랑을 맞은 것이다.

주력 사업인 시멘트와 레미콘이 나란히 적자를 내며 위기를 가속화했고 동양그룹은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꾸준히 자금 차입을 진행했지만 그것이 최악의 수로 작용했다. 현 회장은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꿈이었던 종합금융기업을 포기하고 2010년 동양생명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동양생명 매각 당시 유입된 금액은 약 9,000억원에 달했지만 이후에도 동양그룹의 재무구조는 꾸준히 악화돼 왔다. 그룹의 부채비율도 1,200%까지 치솟았다. 현 회장이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는 추가 자산 매각이었다. 지난해 현 회장은 올해 상반기까지 시멘트, 발전소 외 자산매각을 통해 2조원의 현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자산매각을 통한 자금 유입은 올 상반기까지 1조원도 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동양그룹은 CP발행과 회사채 발행을 통해 대부분의 채무를 늘려왔다. CP와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면 다시 CP와 회사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돌려막기를 하면서 빚의 규모만 거대하게 키운 것이다. '돌려막기'라는 이름의 차입경영은 결국 그룹의 해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직원 믿음 딛고 일어서나?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현재현 회장에 대한 직원들의 믿음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 눈길을 끈다. 동양증권 직원들이 "동양시멘트 법정관리만은 막아달라"고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도 현 회장에 대한 마지막 기대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선 굵은 외유내강형 덕장인 현 회장이니만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번 위기를 딛고 다시금 일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직원들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온 현 회장의 성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현 회장은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룹 총수가 화를 내서 임직원들의 기를 꺾으면 차후 일 진행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에 따라 결정된 내용은 남들이 주저해도 과감하게 추진하지만 그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져 왔다.

현재 동양그룹 안팎의 사정으로 볼 때 현재현 회장의 지배력 상실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지주회사인 ㈜동양을 비롯해 그룹 지배구조를 연결하는 핵심고리들이 대부분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상 현 회장으로서는 경영권을 지켜낼 방법이 없다는 지적이다.

현재 동양그룹의 지배구조는 '현재현 회장→㈜동양→동양인터내셔널→동양시멘트→동양파워→삼척화력발전소', '현재현 회장→동양레저→동양증권' 등의 제조업ㆍ금융업의 양 축으로 이뤄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현 회장의 보유주식 대부분이 담보로 들어가 있는 데다 일단 법정관리가 시작될 경우 해당 지분마저 소각, 대주주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점을 감안하면 앞날은 불투명하다.

채권단이 현 회장을 신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사기성 CP 발행'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더욱 미묘하다. 회사의 부실을 알면서도 이를 감추고 CP 및 회사채를 발행했다는 혐의가 입증될 경우 구자원 LIG 회장이나 윤석금 웅진 회장처럼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재무구조가 원만한 동양시멘트, 동양네트웍스마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점에서 현 회장 자신의 경영권만은 지키고자 수많은 고객들의 이권에 등을 돌렸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법조인 출신으로 재계에 투신한 뒤, 조용한 승부사로 동양그룹을 지배해 온 현 회장의 앞날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