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 충돌'기폭제 된 박창신 신부강연 본질은 '국정원 부정선거' 비판한 것… 연평도 포격은 핵심 아냐5·18 참상 알리려다 신군부에 테러 당하기도… '정권 퇴진' 입장 단호

연합뉴스
올해 내내 정국을 뒤흔들었던 북방한계선(이하 NLL) 문제와 부정선거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의 박창신(71) 신부가 있다.

11월 22일 사제단이 주관한 '불법 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 강론에서 박 신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청와대와 여당, 그리고 보수단체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급기야 박 신부에 대한 검찰 수사까지 이어질 조짐이 보이자 종교계도 거세게 반발,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극한대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서로의 입장이 너무나 확고한 까닭에 이번 사태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정선거 논란에 일정한 거리를 둬온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분열을 야기하는 일은 용납ㆍ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력 대응을 시사한 데 대해 사제단을 위시한 천주교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까닭이다. 지난해 말 은퇴, 앞으로 평온한 여생을 보낼 것처럼 보였던 박 신부의 말 한마디로 벌어진 박근혜정부-종교계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강론 놓고 좌우 시각차 커

박창신 신부의 시국선언 강론 내용 중 정부 여당과 보수단체들이 문제삼는 부분은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한 이유가 NLL에서 이뤄진 한미군사운동 때문이라는 발언이다.

박세환(가운데)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비롯한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강론 말미에서 박 신부는 "독도는 어디 땅이에요? 우리 땅이죠?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와가지고 독도에서 훈련하면 우리 어떻게 해요?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돼요? 왜 대답이 없어요? 쏴버려야지. 안 쏘려면 대통령 거 뭐하러 있어요. 그러면 NLL, 문제 있는 땅에서 한미군사운동을 계속 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쏴야지. 그것이 연평도 포격사건이에요"라고 말했다.

액면 그대로는 NLL의 소유가 북한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연평도 포격까지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 신부 발언에 대한 여권과 청와대의 강경 대응도 일견 이해가 갈 정도다. 하지만 해당 발언에 대한 박 신부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NLL과 연평도 포격 발언이 강론의 본질이 아닌데 보수언론이 일부만을 확대 해석했고 꼬투리를 잡은 청와대와 여권, 그리고 보수단체들이 무가치한 논쟁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박 신부는 "시국미사 강론의 핵심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을 치르며 '종북몰이'를 통해 국가정보원을 이용, 부정선거를 치른 점을 비판한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정권퇴진이 주 내용인데 언론에서는 애꿎은 연평도 포격 부분만 확대 해석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 신부는 연평도 포격에 대해 "서해 NLL은 군사분계선이 아니고 유엔군 사령관이 그어놨을 뿐"이라며 "북한과 남한 모두 자기 영해라고 주장하는데 굳이 거기서 훈련을 했어야만 했는지를 지적하려 했던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반면 정부, 여당과 보수단체는 "NLL에 대한 역사적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명백한 군사분계선으로 존재하고 우리 군이 목숨으로 지켜온 생명선을 무시하고 북한 입장에서 발언을 한 것은 본뜻이 무엇이든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종북 행태"라고 비판했다.

정권퇴진을 말하고 싶었던 박 신부가 굳이 NLL 문제와 연평도 포격 등을 강론에 끼워 넣은 것을 놓고도 시각차가 뚜렷하다. 강론에서 박 신부는 "국정원, 국가보훈처, 군인이 종북몰이로 대선에 개입했다"며 "종북몰이를 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제는 남북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박 신부는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한 주요 방법이 종북몰이였기 때문에 정권퇴진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판단, 설명 차원에서 한 말이었지만 보수언론에서는 유독 이 내용만 확대 해석해 문제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는 박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이래 보수 정권에 항거해오면서 줄곧 북한을 두둔하는 행보를 보였고, 이번 문제 발언도 그런 연장선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종북'을 종북이라고 지적한 것이지 '종북몰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주교 원로로 진보 입장 대변

야권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박창신 신부가 오래 전부터 해온 군부독재와의 싸움을 결말짓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과거 군부독재에 맞서다 신체적 장애를 갖게 된 박 신부가 유신독재를 부활시키려는 듯한 박근혜정부를 향해 목숨마저 던지려 한다는 것이다.

1942년 전라북도 익산의 모태신앙 집안에서 태어난 박 신부는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종교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 다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1973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박 신부는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박 신부는 익산, 정읍, 전주성당 등에서 39년간 사제로 활동했다. 농민ㆍ노동자의 편에서 평생토록 투쟁해온 박 신부는 문정현ㆍ문규현 신부와 함께 천주교 전주교구의 진보적인 시각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신군부 보복테러로 장애 판정

전북지역 내에서만 민주화운동을 해왔던 박 신부를 전국구 인사로 만들어준 사건은 1980년 벌어진 5ㆍ18광주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마흔 살의 젊은 신부였던 그는 가톨릭농민회의 지도신문을 제작하면서 사제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박 신부가 광주의 참혹한 상황을 처음 접한 것은 5ㆍ18광주민중항쟁 직후 열린 농민대회에 참가했던 농민회 총무로부터였다. 며칠 후 천신만고 끝에 광주를 탈출, 전주교구를 찾아온 김현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부터 신군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증언을 들은 박 신부는 광주의 실태를 담은 유인물을 전주 시내와 충남 일대, 경상도에 뿌렸다. 그때가 5월 20일경이었으니 모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박 신부와 전주교구가 배포한 유인물은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첫 신호탄이 된 셈이다.

이후 박 신부는 익산시 여산성당을 중심으로 인근 성당들을 돌며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강론을 펼쳤다. 외부 확성기까지 설치하고 마을 전체를 향해 외치는 박 신부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신군부는 박 신부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다. 전북 여산성당 금마공소에서 괴한들이 휘두른 칼과 쇠파이프에 중상을 입은 박 신부는 그때의 부상으로 지금까지 목발과 지팡이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해당 사건은 미제로 남았지만 여러 정황증거를 수집한 박 신부와 전주교구는 괴한들이 당시 금마에 주둔해있던 7공수여단의 공수대원이라고 주장했다. 박 신부가 금마공소에서 강론할 때 광주에 투입됐던 7공수여단을 지적하며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민족의 배신자"라며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집을 세주거나 쌀을 팔지 말라"고 강론했던 것에 대한 보복테러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괴한들은 허옇게 분칠을 하고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짧게 쳐 군인임을 의심케 했다.

박 신부에 대한 테러사건을 경찰과 군이 서둘러 덮으려 했던 것도 미심쩍다. 사건 당일 괴한들을 태우고 간 택시기사는 이리경찰서, 전북지방경찰청, 군보안대 등에 끌려가 감금을 당하며 갖은 협박과 회유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1988년 사제단의 요청에 따라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지만 결국 치정에 얽힌 폭행사건으로 조작 은폐해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후 박 신부는 5ㆍ18광주민중항쟁의 피해자로 인정, 국가유공자로 살고 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후에도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북연합 공동의장 등을 10년 넘게 맡으며 전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으로 활동해왔다. 동아대학교 자주대오 사건으로 구속된 대학생들에 대한 석방을 촉구하고 개정된 노동법의 재개정을 외치는 등 투쟁 일선에서 정권과 맞서온 것이다. 평소 강론에서 "선을 행하도록 명령받은 사제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사명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는 박 신부는 지난해 8월 익산시 모현동 성당에서 은퇴했다.

정교충돌 어떻게 귀결되나

청와대와 여당, 보수단체들의 파상공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박창신 신부 또한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박 신부는 현 사태에 대해 "연평도 포격이 민감한 사안인 것도 알고 그것에 대해 언급하면 종북몰이를 당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며 "할 말을 했을 뿐인데 잡아간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사제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박 신부는 "일단 종북이라고 낙인찍히면 누구든 곤란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나 또한 실제로 테러까지 당해봤다"며 "신부인 내가 아니면 누가 바른말을 할 수 있겠냐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정권퇴진의 입장도 여전히 단호하다. 박 신부는 "정권퇴진을 요구한 것이 단순히 불법선거 때문이 아니다"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권교체, 즉 민주주의의 회복을 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 신부는 "정권교체의 가장 큰 걸림돌이 종북몰이"라며 "앞으로도 시국미사를 계속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박 신부의 행보에 대해 천주교 내에서는 물론 정치권과 사회 진영에서도 충돌 양상을 보이며 이념 대결과 정교 대립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종교계 진보인사들은 박 신부의 지원사격에 나서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정교충돌 양상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30여 개 개신교 단체들로 구성된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박 신부에 대한 여권의 종북몰이에 대해 공대위는 "신앙과 양심에 입각한 강론의 발언조차 험한 말로 비판하고 성직자를 종북세력으로 탄압하는 작태를 심히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실천불교승가회가 주축이 된 불교계 인사들이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대통령의 참회와 특검 도입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반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대주교를 비롯 보수 인사들은 사제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고, 불교ㆍ기독교의 보수 진영에선 박 신부를 규탄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여야가 박 신부 발언을 놓고 극한 대립을 보이는 가운데 민주당 내에선 박 신부를 옹호하는 친노(친 노무현) 진영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김한길 대표 등 당권파 간에 묘한 간극을 보이고 있다.

사회 진보-보수 진영 간 박 신부를 둘러싼 날선 대립은 좀처럼 완화되지 않고 있다.

박 신부의 말 한마디가 불씨를 당긴 박근혜정부-종교계의 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그 과정에서 박 신부는 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주목된다.

'정의구현사제단-박정희 부녀' 代이은 갈등



긴급조치때 '사제단' 첫 결성
유신헌법 철폐 등 정부와 대립

박창신 신부 발언이 정국을 뒤흔들며 그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 또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부녀와 맺은 악연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제단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이어졌던 1974년 처음 결성됐다. 천주교 원주교구장으로 있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구속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당시 사제단은 제1시국선언을 통해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 무효화와 지 주교를 비롯한 민주애국인사 석방,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언론ㆍ보도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보장 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엄혹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선언이었다.

출범 이후에도 사제단은 유신정권과 대립각을 세워갔다.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박 전 대통령은 정교분리를 강조하며 자숙을 요망했지만 사제단은 재야세력과 연합해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왔다. 말 그대로 종교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당시 민주화운동세력들도 이들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사제단은 굵직한 사회 현안의 전면에 나서왔다.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폭로하며 6월항쟁의 불을 붙였고 2007년 삼성 비자금 조성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MB정권 때는 쇠고기 협상과 한미 FTA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범종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 대통령이 시대를 넘어 정권을 잡은 이 시기에 또다시 사제단과의 충돌이 재현되는 양상이다. 과연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국민적 관심이 점증하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